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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Oct 08. 2024

바르셀로나 꼰 에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두둥

바르셀로나는 이번이 다섯 번째다. 2박 3일, 이렇게 짧게 지내는 것도 처음. 캐리어대신 가방 하나 훌쩍 메고 온 것도 처음이다. 비록 2시간 비행에 1시간 반 연착으로 자정이 넘어 도착했지만, 오자말자 어찌나 마음이 편안한지. 공항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 대학교 정류장에 내린다. 그곳에서 산 대학교 후드티를 입은 차림으로.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 반, 거리는 밝고 흥겨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문 열린 슈퍼마켓에 들러 캔맥주를 하나 사려고 하니, 주인아저씨가 엄중한 얼굴로 벽에 붙여놓은 종이를 가리킨다.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술을 판매할 수 없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그러더니 얼른 가방에 넣으면 된다고 한다.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고 있는 사이 아저씨는 열린 문 밖을 살핀다. 즐거운 아디오스의 세계다.

체크인을 하고 맥주를 마신다. 호텔은 작고 아담하다. 문을 열어놓으니 시원한 밤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아무래도 내일은 날씨가 좋을 모양인가 보다. 뭐, 언제나 그렇겠지만. 어제의 나는 분명 패딩을 입었고, 오늘은 기모가 든 후드티를 입었거늘 아마 내일은 조금 덜 입어도 될 것 같다. 최고 온도 24도. 그런데 태양을 곁들인. 남쪽 바닷가로 넘어온 것이 슬슬 실감 난다. 세면도구와 잠옷을 꺼내며 가방을 훑는데 양말이 없다. 10분 만에 후다닥 가방을 챙겨 나오느라 양말을 빠뜨린 모양이다. 내일 첫 일정은 양말 쇼핑이 되겠군.

그래서 아침 볕을 받으며 그라시아 거리로 향한다. 하늘은 푸르고 볕은 따스하다. 늦은 아침식사를 먹는 사람들을 지나친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본다. 차양을 걷고 부지런히 달리는 시티투어버스도 본다. 카메라를 목에 건 들뜬 얼굴들도 본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 도시의 매력은 무엇일까. 허나 이젠 그 물결에 마냥 동참하기엔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오버 투어리즘. 도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여행자의 규모가 지나쳐 시민들의 일상에 불편함이 생겨나는 지점. 교통 체증, 발생하는 소음과 쓰레기들, 생활 물가를 비롯한 주거비용 상승. 여기에 이르면 불편함은 반감으로 번져간다. 돌아가 너희 집으로.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다소 무거운 생각으로 흐르는 건, 얼마 전 받은 메일 때문에도 그렇다.


스페인책방의 에바 사장님에게 구독하고 있는 스페인 다이어리에도 이 오버 투어리즘에 대한 대목이 있었다. 2년 만에 온 바르셀로나에서 전과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는 말도. 아무래도 오늘 우린 이런 이야기들도 나누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이곳에 출장 겸 여행 중인 에바 사장님을 만나러 왔다. 그러고 보니 2년 전에도 바르셀로나에서 만났었고. 그때는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 할 예정이다. '양말 사러 가신다고요? 이틀은 그냥 신어도 되지 않을까요?'라는 메시지에 나는 수줍게 답장을 보낸다. '저와 함께 방을 쓰실 분이 허락하신다면야.'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더라. 2019년 한남동 디 뮤지엄에서 열린 북페어에서였다. 책 구경뿐 아니라 거래처를 찾고 있던 사장님의 눈에 내가 걸려들었고. 입고와 입고, 파티와 파티, 북토크와 팟캐스트 녹음. 그렇게 서서히 친해져 갔다. 너무 좋아! 매일 만나! 이런 무드는 절대 아니었다. 늘 주춤주춤 서성거리며 책방으로 들어서고,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하고 시작되는 느린 리듬의 사이. 그러다 지난 설엔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때의 난 추운 서울에서 꼬마와 단둘이 있던 때라, 어딘가 서글프고 외로운 마음으로 매일을 지냈다. 그 마음을 싹 녹여주던 떡만둣국. 그리고 모듬전과 김치. 그래서 조금 설이 설다워졌던 밤이었다. 그 뒤로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다시 만나는 게 바로 오늘이다.


안녕하세요! 내가 건넨 인사는 조금 더 기운차게 들렸다. 잘 지내셨어요? 이건 조금 더 다정한 느낌이었고. 우리는 입고와 입고 사이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인사를 나눴다. 책방에서 만날 때랑 배경만 바뀌고 달라진 게 없는데요? 북적이는 까딸루냐 광장의 야외 테이블이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선 손님들이 남기고 간 빵을 두고 비둘기들의 혈투가 일어나고 있었고, 친절한 직원은 여기는 도둑이 많으니까 가방 조심하라며 차분히 일러주었다. 아, 알죠 알죠. 왕년에 가방 좀 털려본 사람으로서(생각해보니 신발도 털렸었다) 배낭을 끌어당기며 짧게 근황을 나눈다. 자, 이제 가 볼까요? 우리는 가방을 짊어지고 역으로 향한다. 같이 갈 데가 있었다.


목적지는 바르셀로나 근교의 작은 마을 라 가리가. 에바 사장님의 바르셀로나행을 듣고 만남을 결심한 때부터 같이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복잡한 역 안에서 기차표 끊기 소동 다음엔(네 번째 시도한 자동판매기에서 살 수 있었다) 마법처럼 6분 후 R3 기차가 도착했고(구글맵은 30분을 기다리라 했다) 우리는 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 함께 덜컹이기 시작했다. 서울 이야기, 책방 이야기, 프랑크푸르트 이야기, 독일 음식과 날씨 이야기(단조의 배경음이 흐른다), 꼬마 이야기(장조로 급선회한다)를 나누는 사이 50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때부터 슬며시 예감했다. 에바 사장님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은 어쩐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별 거 안 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있고, 어딘가 느긋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몇 년 동안 알아왔지만 아직 서로 깍듯한 존댓말을 쓰는 사이다. 그런데 또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들을 알고 있는 사이기도 하고. 아마 우리 대학생 때 이렇게 저렇게 스쳐가기도 했을 거예요,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아하던 클럽과 술집이 겹치기도 한다. 건재함에 감탄하고, 사라짐에 애석해하는 사이. 그런데 서로가 거래처이다 보니 계좌번호도 아는 사이. (그는 나의 주민번호도 알고 있다, 나는 모르는데) 오늘 우린 같은 방에서 함께 잘 예정이고,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 양말을 사서 신었다. 누가 보면 양말 가지고 뭐 하는 줄 알겠네, 싶지만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기차는 라 가리가 역에 도착한다. 2년 전과 비슷하게 작고 귀여운 역. 자, 이제 가 볼까요? 때는 점심,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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