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끓는 피가 식고 나면

Project B

by 한량

몇 개월 후, 이 모든 것이 끝난다면.


11월의 초입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하루하루의 시시콜콜한 일들, 핑퐁처럼 오고 가는 말들, 나를 둘러싼 소요와 사방에 흩날리는 고민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러다 자문했다. 이것은 흡사 종말론자가 아닌가. 지리멸렬한 세상이 끝나고 한 날 한 시 우리 모두가 공중으로 들려 올려진다는 굳건한 믿음. 그러면 종말을 앞두고서 남은 날들은 어찌 보내야 할까. 어떤 이들은 모든 삶을 멈추고 엎드려 기도할 것이다. 그날,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빌고 빌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마음대로 흘려보낼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난다니까 아쉬움 없이 삶을 마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지. 그게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거침없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제멋대로 하고 말 테다.


나는 엎드려 신에게 빌고 싶지도, 또 다르게 엎드려 요란한 일들을 하고 싶지도 않다. 분명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종료다. 계속 지지부진하게 미뤄오던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고 깔끔하게 끝내는 것. 그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도전하는 것. 줄곧 꿈꿔왔으나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나아가지 못했던 일을 용감하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종말론자와 나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수동적으로 삶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대신, 나는 직접 버튼을 누르고 싶다. 종료 후 재시작, 대신 그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내가 질 것을 맹세하고서 꾸욱 누르는 거다. 결국 나를 구원하는 이는 나라는 걸 새기면서.


몇 년 전, 나는 나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들에 지쳐 몹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피곤할수록 신경줄은 얇아져 마음껏 잠들지도, 대놓고 몸져눕지도 못했다. 삶을 지탱하는 기쁨들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화석처럼 굳은 책임감만 남아 '지각은 안 돼, 결근은 더더욱 안 돼.' 중얼거리며 핏발 선 눈으로 핸들을 잡았다. 누가 날 좀 들이받아 주었으면. 전방주시태만 외 다른 과실은 없이 응급실에 실려가고 싶어. 아무래도 보험료 할증은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소망을 되뇌며 출근을 하곤 했다. 몸은 젖은 솜처럼 늘 무거웠는데 나를 적신 건 물 대신 신나였다. 화기 근처에라도 가면 다 싸잡아 불지를 기세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나를 너를 우리를 다 불태우기 전에 나는 떠나야겠어. 여기서 이런 삶을 지속할 수는 없어. 당장 나는 떠날래.' 넘실거리는 눈물과 콧물을 삼키며 나는 애원했다. '어디로 떠난다는 거야?' 라는 물음에 내 머리는 생각을 쥐어짜냈다. 남국의 햇살, 일렁이는 파도,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호흡과 명상. 차라리 그런 방랑이면 좋았으련만, 나는 도피처마저도 숨기 좋은 곳을 원했다. 사람은 아주 많은데 나를 아는 이는 하나도 없는 곳이면 숨기 좋겠지. 높디높은 다락방에 다시 작고 작은 계단을 올라 파묻히기 좋은 구석이면 좋겠어. 이상한 이유로 목적지가 정해졌고, 그걸 논리적인 척 늘어놓기 위해 구차한 설명들이 따라붙었다. '일단 어학 공부를 해야겠고, 그러고 나서 학교를 다시 갈래. 그래, 그러지 뭐. 일단 퇴직금 탈탈 털면 그만한 비용은 나오지 않을까? 내가 번 돈으로 가겠어. 그러니 말리지 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기름에 전 손으로 불안하게 라이터를 달각거리는 사람처럼 보였을 테니.


결국 나는 그 손들을 뿌리치지 못했다. 걸음을 떼려다 주저앉고 말았다. 용기는 미약해지고 기세엔 바람이 빠졌다. 무안함과 미안함, 자괴감도 나란히 밀려와 부서졌다. 그러나 이야기는 또 다르게 흘러간다. 그 사이 나를 충동하는 이 생각이 단순한 바람이었는지 아니면 정녕 이루고 싶은 소망인지 기다려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혼자의 세계, 둘만의 시간에서 셋이 함께 하게 되기까지, 꿈에 가닿는 방법이 복잡해질지언정 꿈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나는 여전히 또 다른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고.


그래서 혈기만으로 무작정 뛰쳐나가는 대신, 긴 시간 여러 방법들을 모색하고자 했다. 모든 것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가쁠 때 내 눈을 가렸던 것들이 피가 식고 나자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 익숙한 이 삶 대신 낯선 곳에서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하려면? 결론은 단순 명료했다. 돈,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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