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B
내게 돈은 뭘까.
나는 줄곧 돈에 관해 나이브한 관점을 가져왔다. 좋게 말해서 나이브고,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 발 디디고 살면서 어떻게 돈에 무관심할 수 있을까? 걱정 따위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풍족해서? 아니면 어려운 형편에 대한 반감과 회피? 내 안엔 그 둘이 적당히 섞여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양복을 짓는 기술자였다.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디자이너 부띠끄를 운영하는 셈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양복을 짓기 위해, 세세한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고른 다음 본을 떠 잇고 기웠다. 모든 것이 맞춤인 시대였다. 할아버지에겐 어떤 체형과 어느 취향이라도 모두 소화할 만큼의 넉넉한 손기술이 있었다. 게다가 그를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 줄 하나, 오뚝한 자존심도 있었다. 뛰어난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현실적 어려움이 빚어내는 공백은 기술로 메우면 된다. 다만 장인은 무례하고 거친 손님은 제대로 탓했다. '자꾸 그라믄 내 일 안 할라요.' 하고 양복을 맞추겠다는 손님을 문전박대하기도 했다. 씩씩거리며 가게를 나선 손님을 몰래 잡는 것은 할머니의 일이었다. '영감 달래서 내가 기한 맞춰보께요. 걱정 마이소. 미안합니다.' 할머니는 울컥 화를 내는 남편을 달래고, 벌컥 돌아서는 손님의 비위도 맞춰야 했다. 일곱 남매를 키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가치 없다.' 라는 말로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을 딱 자르곤 했다는데. 내 안에 깃든 '몇 푼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보다 자존심이 더 소중하다' 는 마인드는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자존심보다 '기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기분이 좋아서 쓰는 돈, 반대로 기분이 나빠서 쓰는 돈. 그런 돈의 단위는 죄다 자잘했다. 손등에 얹었다 한번 튕겨 낚아채는 공깃돌처럼 잘디 잘은 액수였다. 동시에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돈들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에둘러 생각하며 지냈다.
아빠가 돈을 만지는 일을 했음에도, 아빠의 일을 '돈을 만지는 일'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아빠는 은행원이었다. 엄마 역시 그랬다. 둘은 사내 연애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그럴 경우 한 명이 그만두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인 시대였다. 한번 직장은 당연히 평생직장, 사내의 모두가 정규직이었으므로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집에서 나와 동생을 키우고, 아빠는 돈을 벌어온다. 외벌이였으나 가정 경제는 잘 굴러갔다. 여럿 기념일엔 선물을 챙기고, 크고 작은 여행을 떠났다. 63빌딩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보고, 샘터 소극장에서 연극을 본다. 종로와 명동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촘촘하다. 아빠가 연말 보너스를 받아오는 12월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방학식 전날이면 나는 직접 만든 초대장을 돌렸다. 김밥과 치킨, 떡과 과일, 그리고 두툼한 케익 앞에 앉아 나이 만큼의 초를 꽂고 노래를 불렀다. 둘러앉아 받은 선물들을 하나둘 풀어보고, 벽에 붙인 풍선들을 떼어 날리다 그도 지겨워지면 뛰어나가 눈싸움을 했다. 여름이면 상가 화장실에서 물풍선을 잔뜩 만들어 서로를 향해 던졌다.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의기양양하게 모험을 떠났고, 철봉만 보면 매달려 기어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같은 구조의 아파트들이 끝없이 늘어선 동네, 인접 단지의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가는 동네, '몇 동에 사는 누구' 하면 대충 어림짐작 가능한 동네. 그 동네의 작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나와 동생은 차차 자랐다.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을 다녀와 아직 다 못 푼 눈높이 수학을 슬금슬금 숨길 때, 나는 지극히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줄 알지 못했다.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맺혀, 훗날 다시 찾아 눈물을 떨구게 될 줄도 몰랐다. 조금씩 머리가 굵어지고 더이상 부모님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 IMF가 왔다. 호환마마보다 더 두려운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