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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19. 2024

한국인의 멀티태스킹, 경쟁력인가 함정인가.

정보화 시대의 딜레마

90년대 들어서서 PC의 운영체제가 마이크로소프트 도스에서 윈도즈로 바뀌면서 다중 작업이 가능해졌다. 단일 작업 환경으로 설계된 MS 도스에서는 지금처럼 컴퓨터 모니터에 여러 개의 창을 띄어놓고 작업을 수행하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했다. 다중 작업을 뜻하는 멀티태스킹 기능은 그래픽 인터페이스(GUI)와 함께 MS 윈도즈 운영 체제의 큰 장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컴퓨터에서 멀티태스킹은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한 작업을 마무리하지 않고 다른 작업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사용자 경험을 향상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인간도 여러 작업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작업의 복잡성이나 중요도에 따라 효율성이 떨어진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멀티태스킹을 할 때 효율적이라는 느낌을 받지만 막상 시간을 재고 일의 효율을 측정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감정, 피로, 집중력 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을 할 때 여러 개의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듯한 뿌듯함을 느끼지만 실상은 속고 있다는 얘기다.




멀티태스킹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동서양의 업무 습관을 비교해 보면 문화적 차이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영어권 국가 사람들이 자주 중얼거리는 'one at a time'은  여러 작업을 한꺼번에 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처리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자는 관용어다. 멀티태스킹을 경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영어권뿐 아니라 다른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서서 얘기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다가가도 대화가 끝날 때까지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 사람들은 옆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며 답답하고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효율성과 정확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하나의 작업에 집중하여 빠르게 처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업무 집중에 대한 방해를 최소화하는 개인 공간 (=독방) 제공에도 관대하다. 근무 시간에는 딴짓하지 않고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서양에서는 업무 시간 내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해서 개인 시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우리는 업무 시간이 길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헌신적인 태도로 여기는 정서가 남아있다.


집단 중심의 협업과 조화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개방형 사무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일상화되어 있다. 끊임없는 소통과 협업을 강요받아 효율이 감소하고, 수시로 불러제끼는 상사 때문에 업무 집중도가 떨어진다. 이러한 업무 환경에서 비롯되는 명확하지 않은 책임 범위와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희생'으로 미화시킨다.

Unsplash의Sreehari Devadas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멀티태스킹에 익숙하다. 


예전 한국의 농경 사회에서는 쌀이 주요 작물이었다. 벼의 생육조건을 놓고 볼 때 한반도는 사실상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에 걸려있다. 여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습도가 높은 반면 겨울에 건조하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기후 조건은 벼농사에 특별한 도전을 제시한다. 때를 놓치면 수확량이 크게 감소하거나 전체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강박에서 농부는 하루 중 장시간을 논에서 보내며 다양한 작업을 수행했다. 현대적 의미의 멀티태스킹이라고 할 수 있다.


밥상에 모든 음식을 한 번에 올려놓고 먹는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멀티태스킹이 관찰된다. 밥과 다양한 반찬을 번갈아 먹는 과정에서 수저는 각 음식을 선택하고 섭취하는 순서를 빠르게 판단하고 이동한다. 한식에도 차례대로 나오는 코스 요리가 있기는 하지만 억지스럽고 어색하다. 




'정리하는 뇌'의 저자 대니얼 레비틴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도록 진화했으며 덕분에 우리 선조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도구를 발명하고 포식자나 외부의 적들로부터 부족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일상적으로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등 여러 전자기기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몇 가지씩의 작업을 하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 두 종류의 내비게이션을 비교 검토하고, 카카오톡에 회신하고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화장을 고친다. 빠른 생활 리듬과 경쟁적인 환경으로 인해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여러 일을 동시에 쳐내는 사람으로 길들여지고 있다. 


이어폰을 끼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자주 본다. 음악 듣는 것도 작업이라고 한다면 멀티태스킹이다. 수영 선수가 경기 전에 헤드폰을 끼고 긴장을 늦추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음악을 들으면 공부에 집중이 잘 된다는 아이들의 주장이 설득력은 없지만 잔소리하던 부모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사용해 온 정보화 세대는 과거와 달리 멀티태스킹을 선호한다.


정보화 시대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속함을 강조한다. 과거 열악한 벼농사 환경에서 형성된 한국인의 조급증과 멀티태스킹 성향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여 빠른 경제 발전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치 서커스에서 저글링 공연자가 여러 공을 동시에 던지고 받듯이 한국인은 뛰어난 업무 처리 재간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멀티태스킹의 지속 가능성은 불확실하다. 저글링 공연에서 한순간의 실수가 모든 것을 무너뜨리듯이, 멀티태스킹엔 작업 효율 저하와 스트레스 증가와 같은 위험이 숨겨져 있다. 정보화 시대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인은 멀티태스킹이라는 양날의 검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은 많은 ‘작업 기억’을 필요로 하고, 작업 기억을 많이 쓰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그만큼 심층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용량이 줄어든다. 단순히 속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새로운 역량을 키워나가야 미래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 영국 에섹스 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대화 중에 스마트폰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둘 간의 관계에 균열이나 신뢰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동시에 모든 걸 잘할 순 없다. 아이 양육, 부모 봉양, 직장 생활, 집안일, 취미 활동, 인간관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지만 한꺼번에 다, 그것도 모자람 없이 잘 해내려는 건 욕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오늘, 나아가 이번 주, 이번 달엔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에 노력을 쏟을지 선택할 일이다.  우리 몸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이고, 우리 뇌는 아직도 멀티태스킹이 아닌 모노태스킹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지 사진 출처 © villxsmil,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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