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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n 10. 2024

[함안] 생육신 조여의 자취 2

백세청풍 百世淸風


https://brunch.co.kr/@hhjo/313


함안 군북면의 원북리 마을 회관 앞 개울을 끼고 좁을 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어계고택漁溪古宅이 나온다. 조려 선생이 낙향해서 학문에 정진하던 곳이다. 어계漁溪는 조려의 호다.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낸다고 해서 스스로를 어계은자漁溪隱者라 칭호하였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단종 원년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 당하자 비분을 참지 못하고 고향인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단종을 향한 절의를 지켰다. 


어계고택은 조려의 할아버지인 조열趙悅 때부터 살던 집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공조전서를 지낸 금은琴隱 조열은 이색, 정몽주 등과 빈번히 어울리며 시국을 걱정했다. 조열은 공양왕 3년에 이성계의 병권兵權을 빼앗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축출당해 함안으로 내려왔다. 거문고와 시, 서화에도 능했는데 훗날 태조 4년, 이성계가 한양성 낙성 연회를 열면서 조열을 초청해 거문고를 타 달라고 부탁하자, 전에 공민왕이 부탁해도 타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정종이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그려달라고 하는데 다시 공민왕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자 왕이 노해서 감옥에 가두었는데 태조가 알고 풀어주었다는 기록이 금은 실기琴隱實記에 기록되어 있다. 

어계고택

어계 고택에서 되돌아 나오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 서원과 채미정이 있다. 둘 다 조려를 기리는 사적들이다.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약 2백 미터 걸어가면 서산서원이다. 1700년 초 영남의 선비들이 생육신의 충절을 숭모하고자 조려가 은둔했던 백이산 아래에 세운 서원이다. 생육신인 이맹전,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1713년 숙종이 현판을 하사해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 한쪽에 서있는 검은 육각 돌기둥의 각 면에 생육신 한 분 한 분의 행적을 새겨 놓았다. 


'서산西山'은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연유한다. 천자국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은나라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의 왕자 백이 숙제 형제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살다 굶어 죽었다. 형제는 죽기 전에 '고사리를 캔다'라는 뜻의 채미采薇가를 지었는데 서산西山으로 시작한다.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 (以暴易暴兮)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不知其非矣)...
채미가 초장 


흔히 생육신의 충절을 백이 숙제의 고사에 비유하지만 시대적 상황을 보면 명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세조는 나이 어린 단종을 겁박하여 부도덕하게 왕위를 강탈했고, 주周나라 무왕은 폭군의 대명사인 은나라 주왕紂王을 응징하고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채미가의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꿨다'라는 대목만 보더라도 주왕의 폭정은 백이 숙제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부도덕한 개인적 권력욕에 항거해서 은둔한 생육신이, 폭군일망정 주왕紂王에 대한 충절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백이 숙제보다 공익적 정당성에서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서산서원   /   채미정


서산서원 건너편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 채미정采薇亭이다. 조려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서산 서원 담장 밖에 지은 정자다. 


채미정 동쪽에 쌍안산이 있는데, 숙종이 단종 임금 복위 후 내린 어계 선조사 제문에서 조려의 절의가 고대 중국의 백이 숙제와 같음을 찬양한 이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함안 군북역 주차장에서 출발해서 백이산 정상과 숙제봉을 8자로 도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약 8 킬로미터의 편안한 솔숲 길이다. 중간에 공룡 발자국 화석을 지난다.  


채미정엔 큰 글씨의 백세청풍百世淸風 편액이 걸려있다. '백세청풍'의 원전은 백이 숙제의 비석에 주희가 쓴 글이라고 한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어계 조려를 중시조로 모시는 함안 조 씨 집안의 종훈이기도 하다. 채미정 근처에 마침 함안 조 씨 대종회 사무실이 있어 들렀더니 조욱래 대종회장이 백세청풍의 의미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백세百世는 (사대부가 표현할 수 있는) 영원의 세월을 뜻하며,  청풍淸風의 청淸은 매섭도록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바람이 아니라 군자君子의 덕德이요 절개節慨다. 따라서 백세청풍이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매운 선비의 절개를 말함이다.
함안 조 씨 대종회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인 조영석 趙榮祏이 지은 채미정의 기문엔 '육 선생께서는 단종이 선위禪位 한 후 모두가 선왕의 영靈에 성의를 바치며 자취를 감춰 은거하면서 천지와 인생의 법칙을 밝혔으며'라는 대목이 나온다.'  조려의 9대 후손이기도 한 조영석은 조선시대 풍속화에서 중국 냄새를 걷어내고 후기 풍속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호는 관아재 觀我齋.


영조가 당시 의령 현감으로 가있던 조영석에게 낡은 세조의 어진(御眞 : 임금의 초상화)을 중모(重模:다시 그리기) 하라고 명했다. 조영석이 그의 형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감탄한 영조가 특별히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조영석은 '그림 그리는 것과 같은 말예(末藝: 변변치 않은 재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의 도리가 아니다’라는 이유를 대며 어명을 거역하고 의령 현감 직에서 파직당했다. 지금 시대에 대통령이 자기 할아버지의 초상화 좀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데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거절할 지방 공무원이 있을까?  


조영복 초상화 (조영석 화) : 보물 제1298호,경기도박물관 소장


문신文臣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림이 별로 안 좋다'는 게 임금에게 불복한 명분이었지만 영조도 눈치가 없었다. 생육신 조려의 직계 후손인 조영석으로서 어떻게 세조의 얼굴을 그려 줄 수 있었겠는가. 태조의 어진을 그리라는 정종의 청을 거절한 금은 조열 또한 조영석의 11대 선조다.  조영석은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는 '숙종 어진 도사肅宗御眞圖寫' 작업엔 책임자로 참여했다.  



무진정 - 반구정 - 합강정



함안군에서 지정한 함안 9경에 세 채의 정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조려의 자손과 연고가 있다. 


무진정 無盡亭: 함안 낙화놀이 축제로 유명해진 무진정은 조려 선생의 손자인 무진 조삼趙參이 을사사화를 미리 예상하고 낙향해서 후학을 양성하며 머무른 정자다. 사헌부 집의관을 지낸 조삼은 생원 시절에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지은 무진정 기문記文엔  ‘천명을 알았기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에 능히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세붕도 함안 태생이다.


반구정(伴鷗亭): 낙동강 700리에서 가장 풍치가 좋다는(함안군 주장) 용화산 기슭에 있다. 조선 중기 학자 조방趙垹이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조방 역시 조려의 현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의 홍의 장군 곽재우를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과 기강 등을 지키는 전공을 세웠다. 


합강정(合江亭) : 반구정 근처에 있다. 학자인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수학하던 정자다. 조임도는 반구정 조방의 조카다. 인조반정 후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조정에 대군사부大郡師傅,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의병장 조종도趙宗道 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모집에 진력하였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규합, 가족까지 이끌고 황석산성黃石山城 (함양)을 지키면서 가등청정이 지휘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합강정의 조임도趙任道 항렬이 같은 조려의 후손이다. 


함안 조씨 파보 / 함안 조씨 대종회 제공

주로 함안 지역에 세거했던 어계 조려 후손 중에서 강한 정의감으로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운 이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여말 선초麗末鮮初 정권 교체기에 활동하면서 지조를 지켰던 조열로 시작해서 조려· 조삼·조종도·조영석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절개와 지조가 반드시 집안의 유전적인 기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직계 십 대만 내려가도 근연도 (近緣度·degree of relatedness) 측면에서 생물학적으로 남이나 다름없다. 우리 민족은 조상에 누累가 되는 행동을 매우 불명예스럽게 여긴다. 조상들의 용기와 얼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가정교육을 통해 가문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가풍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풍의 뿌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은 의리義理 지조志操를 중요시한다. 의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고(조폭 사이의 '의리'와 차이가 있다), 지조는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의지다. 조려 가문의 종훈인 백세청풍 또한 선비정신과 일치한다. 




예전에 집안 어른들은 몇 대조 선조가 무슨 벼슬을 지내셨느니라... 하는 식으로 자손들을 가르치곤 했다. 요즘 그러면 시대착오적인 조상 자랑이라고 반격당하기 십상이다. 조상 자랑은 조상 탓과 한 끗 차이다. 


조상이 누린 영광보다는, 우리 선조들이 '천지와 인생의 법칙'으로 실천한 '의리와 지조'를, 미래를 향한 나침반으로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 한다. 


#백세청풍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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