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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n 03. 2024

[영월] 생육신 조려의 자취 1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복종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지혜로 여긴다.  권력과의 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마련인 현실에서 강자에게 숙이는 것이 어쩌면 나와 가족의 안락을 위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동양 고전에는 권력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굴복하는 행위가 위험하고 해로움을 강조하는 대목이 수차례 나온다. 이는 권력자의 판단을 어둡게 만들고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군자 또한 아첨을 탐하지 않고 곧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며 권력자에게도 경고하고 있다. 아첨은 하지도 받지도 말자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권력에 영합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변화와 발전은 권력자에 대한 저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억압과 불평등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정의가 가능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불의가 만연한 어두운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목숨을 걸고 권력에 맞서는 의로운 사람들의 용기 있는 모습들이 더욱 빛나게 드러난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겁박하여 천륜을 어기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도 그랬다. 


당시 조야의 적지 않은 엘리트가 세조의 불의한 왕권 찬탈에 저항했다. 개인의 가치관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위험하지만 고귀한 선택을 한 선비들 중에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충신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른다. 한편 벼슬을 버리며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는 생육신生六臣으로 분류하는데,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이 그들이다. 생육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단종을 추모하면서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냈다. 



청령포 / 영월군 홈페이지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단종 원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당시의 사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 당하자 조려는 비분을 참지 못하고 고향인 함안으로 낙향해서 은거하며 단종을 향한 절의를 지켰다.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낸다고 해서 스스로를 어계은자漁溪隱者라 칭호 하였다. 함안에서 멀리 유배지인 영월을 찾아 단종에게 문후를 드렸다. 


단종이 유배당해 머물렀던 영월의 청령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이다. 단종의 숙소인 어소御所, 금표비,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소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 숲이 270°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유람선을 타고 들어간다


단종이 승하하자 어계 조려 선생이 영월 청령포에 당도하여 호랑이 등에 업혀 강을 건너 단종의 시신을 염습했다는 호도청령포虎渡淸冷浦 설화가 남추강집과 대동기문大東奇聞, 강원도지, 영월읍지 등에 수록되어 있다.


영월읍지


어계 조공 려는 함안에 살면서 영월 오백여 리를 매월 세 번씩 상감 문안을 드리면서 중도에는 원호의 집에서 유숙하였으며 매일같이 성수의 만세 하심을 하늘에 기도하더니 정축년 10월 24일에 노산군의 승하하셨음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밤중에 청령포에 당도하여 보니 역시 배가 없는지라 나루를 건너지 못하여 방황하던 중 날이 장차 밝고자 하는지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니 강물도 따라 울더라. 마침  의복을  벗어 등에 지고 물을 건너려고 하니 문득 옷을 당기는지라 뒤를 돌아다보니 큰 범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천리 분상에 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다. 이강을 무사히 건너면 다행히 상감을 수렴할 것이요 건너지 못하면 창해의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당기는고' 하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므로 공이 그 뜻을 짐작하고 등에 업혔더니 마침내 나루를 건너주어서 시소屍所에 들어가 보니 다만 수직守直하는 사람 둘 뿐이더라. 통곡 사배한 후 옥체를 수렴收斂하고 문을 나오니 기다렸던 범이 다시 강을 건너 주었다.
영월읍지 寧越邑誌 / 함안 조씨 대종회 번역



 영월읍 어계비원


단종 유배지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영월읍 입구에 조려의 충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조성한 어계비원이 있다. 호랑이 등위에 세운 조려 사적비가 특이하다. 


한편,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 관아의 호장 엄홍도가 밤중에 거두어 암매장했다는 설도 있다. 


장릉에 있는 호장 엄홍도의 공적비에는 그가 했다는 말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달게 받겠노라. 


조선왕조실록 중 단종 부분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세조 때 노산군일기로 편찬되었는데 과정도 불투명하고 단종에게 불리하게 손을 탄 흔적이 많다. 숙종 때 단종이 신원(복위) 되면서 단종실록으로 제목만 바꿔 달았을 뿐이다. 따라서 단종의 자취는 야사나 구전에 많이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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