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우리나라 군청은 대개 군郡과 명칭이 동일한 읍邑에 소재합니다. 산청 군청은 산청읍에, 장성 군청은 장성읍에 있듯이요. 경남의 함안 군청도 원래는 함안면에 있었는데 6.25 때 불타버려서 내친김에 (지금은 함안면으로 이설한 ) 당시 경전선 철도가 지나가던 가야면으로 군청사를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야면은 읍으로 승격시켜 줬고요.
한국에 몇 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경남 고령군의 군청도 고령읍이 아닌 '대가야읍'에 있는데요, 삼국 시대 가야국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도읍이 있던 자리라는 이유로 멀쩡한 고령읍을 대가야읍으로 개명했다네요. 그런데 고령군 대가야읍의 인구는 함안군 가야읍의 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겉만 보고 속을 판단하지 말라는 영어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도로 표지판에 나오는 군郡이나 시市의 지명은 보통 군청, 시청 소재지를 가리킵니다. 영월군 관내에 있는 표지판에서 '영월'은 군청이 있는 영월읍 방향이란 얘기지요. 그러면 함안군의 도로 표지판에서 '함안'은 어디를 뜻할까요? 군청이 있는 가야읍인가요 아니면 함안면인가요? 몇 군데 물어봤는데 시원한 대답을 못 들었어요. 제 아내는 아예 질문 자체를 이해 못 하더군요.
각설하고 이제부터 함안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걷을 수 있는 길을 얘기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편안한 길의 기준은 두 가지인데요, 우선 평탄한 길입니다. (국가대표 수영 선수 출신이 아닌) 보통 사람이 가벼운 노래 정도는 박자 놓치지 않고 부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다음은 주변의 빛과 바람이 아름다운 길입니다. 제 필력으로 수식하기가 어려운 대목입니다만, 우리 조상들은 자연경관을 풍광風光으로 헤아렸습니다.
함안은 관광지로서 좀 낯선 고장이지만 의외로 걷기에 편안한 길이 길에 널려있습니다. (말이 이상해졌어요.)
남쪽으로 솟은 주산 여항산과 북쪽을 흐르는 낙동강·남강 사이, 함안의 땅과 물이 바람과 햇빛을 만나 환상적인 길을 만들어 냅니다.
함안군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11 길 중에 남쪽 산기슭의 여항 호수길, 북쪽 강변의 악양 둑방길, 그리고 읍내 성산산성城山山城 길 세 곳을 소개합니다. 노부부가 오붓하게 걷기에 적당한 너그러운 길입니다.
1. 여항산 호수 둘레길
봉성 저수지라고도 부르는 여항산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스입니다. 산 그늘이 늘어진 호수를 끼고 반원을 그리며 걷다가 끝나는 지점에서 제방으로 좌회전합니다. 저수지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며 호수를 가로지르면 둑길 끝에 철문이 나와요. 이제 길이 끊어지나 보다 하면 둘레길은 분위기가 바뀌어 아늑한 숲 속 오솔길로 이어집니다. 소나무 울창한 데크 길 다음 마지막 구간은 아기자기 정겨운 마을길이고요.
푸른 여항산을 배경으로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2.9km 길이의 산책로는 중간에 전시된 목조각木彫刻을 감상하는 시간 포함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주차 공간도 있어요.
2. 성산 산성 길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쳐있는 조남산 정상에 있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은 삼국시대 신라의 숨결을 간직한 산성입니다. 산성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300여 점의 목간으로도 유명합니다. (목간木簡은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에 적은 문서를 말합니다. 공자가 주역을 하도 많이 읽어 책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 韋編三絕 고사에 나오는 책도 목간이지요.)
티맵에 성산산성을 치고 가면 백산 마을로 데려다주는데 거기서는 산성 진입로가 잘 안 보이데요. 함안 낙화놀이로 알려진 무진정 (정자)에서 올라가는 편이 무난합니다.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오륙백 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서 숨이 좀 찰 때쯤 분지 형태의 정상부에 도달하고 1.4 kM 둘레길이 시작됩니다. 푹신한 풀밭 길을 걸어가는데 마치 천상의 초원에 초대받은 듯합니다. 둘레길의 이름도 '하늘길'입니다.
산성길 중간에 앉아서 점심 먹고 한 잠 자기에 제격인 평상이 여럿 있습니다. 해발 140 미터 정도의 산성 정상에 올라 한 바퀴 돌고 무진정으로 복귀하는 데 왕복 2.5 kM, 1시간 정도 걸리지만 맘 내키면 한나절도 보낼 수 있습니다.
3 악양 둑방길
악양 둑방길은 함안 법수면 남강 변 둑에 조성해 놓은 꽃길입니다. 강 건너는 의령군이고요.
둑방 길을 따라 붉은 양귀비꽃이 발칙하게 피어있습니다. 둑과 남강 사이에 풍요롭게 펼쳐진 둔치에 내려가서 풀밭, 꽃밭 사이를 누비다 보면 둑방 너머에 두고 온 현실이 아득합니다. 둑에서 내려다보며 사진만 찍다 가는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싶어 집니다.
들판 한쪽에 경비행기 조종 가르치는 데가 있고 다른 쪽으로 보라색 수레국화밭이 전개됩니다. 수레국화밭 저 쪽 언덕에 누각이 걸려있네요. 전 날 내비게이션을 잘 못 찍어 중국집 악양루로 가는 바람에 포기했던 악양루입니다. 들판 끝까지 걸어가니 악양루 언덕 앞으로 흐르는 함안천이 가로막습니다. 오늘도 악양루는 패스합니다.
너른 둔치 곳곳에는 휴식할 수 있는 정자가 마련되어 있어 꽃과 자연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습니다.
둑방길 시작점 3백 미터 전에 공영주차장이 있습니다
오월과 함께 봄날은 갑니다.
백설희의 간드러진 봄날도 가고,
불쌍하게 보이지만 멋있는 아저씨 최백호의 봄날도,
들썩들썩 장사익의 봄날도,
한영애의 흐느적거리는 봄날까지
온갖 그렇고 그런 봄날이 갑니다.
내게 오기나 했는지 모를 봄날이지만 간다고 하니 아쉬어지네요, 한 번 더 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