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과 엘리트
카페나 도서관에서 남녀가 부딪혀 음료를 쏟거나 책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영화에서 청춘 남녀의 첫 만남을 연출하는 단골 수법이다. 까칠한 남자와 밝은 여자 주인공은 티격태격하며 뜸을 좀 들이다가 불이 붙는다. 클리셰라고도 부르는 영화의 그렇고 그런 전개 방식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영화 제작의 전략적 선택이다.
영화는 현실을 넘어선 꿈과 기적을 통해 관객에게 대리만족과 활력을 준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클리셰를 과도하게 적용하면 영화의 흐름을 들켜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는 '주인공 보존의 법칙'은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다. 중심인물이 결말까지 버티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당연하고, 그러니까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불멸에 가까운 생존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설정들은 관객을 식상하게 만들고 결국 영화의 질을 떨어뜨린다.
어쩌면 영화 속 주인공의 클리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엘리트 중심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엘리트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갖게 되고, 이는 우리의 사회적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주인공은, 불변하는 지위와 특권을 누리며 보통 사람과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를 닮았다.
완벽한 의사소통 :
주인공은 과묵하다. 가끔 내뱉는 몇 마디 (대개 명언임)가 주위 사람들을 사로잡고 고민하게 만든다. 나머지는 방정맞은 조연이 망가지면서 재미있게 채워준다. 반면,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해서 나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주인공이 되레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는 바람에 관객의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상대방을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권위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복종을 강요하는 명령과 지시는 짧을수록 효과적이다.
언제나 행운아 :
주인공은 복잡한 거리에서 택시를 잘도 잡는다. 현실에서는 택시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지만, 주인공이 '택시!' 하고 외치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가 대령한다. 잡은 택시를 타지 않고 상대역 배우와 이별의 슬픔을 나누느라 시간을 끌어도 맘 좋은 택시 기사는 조용히 기다려준다.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면 항상 창가 쪽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법과 규칙에서 예외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회 시스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와 자원을 독점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불사조 :
주인공은 부상을 당해도 한두 장면 만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하고 다음 미션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대부분 총알이 주인공을 피해 가지만 어쩌다 총상을 입더라도 옆구리 터지는 정도가 최악이다. 근처 마트에 가서 소독약과 붕대를 사서 혼자 땜방하며 이를 한번 악물면 활동하는데 지장 없다. 매를 맞더라도 기껏해야 이마에 두어 군데 생채기가 나거나, 눈썹 위에 몇 바늘 수직으로 봉합하는 정도로 선방한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스스로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중죄를 저질러도 가벼운 형벌이나 집행을 유예받아야 마땅하고, 설사 감옥에 가더라도 형기를 다 살고 나오면 '촌놈'이다. 대충 풀려난 후 고개 빳빳이 들고 활동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
충동적 유학:
주인공이 실연당하면 바로 다음 주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한편 재벌 집 아들이 서민과 연애를 하면 뉴욕 지사로 발령을 내버린다. 역시 다음 주에 짐 싼다. 유학을 가려면 지망하는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고 유학 비자를 수속해야 하는 등 준비할 게 많다. 실연을 미리 계획하지 않은 이상 다음 주 출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주재원으로 가기 전에 현지 국가의 취업 허가가 필요한데 한참 기다려야 한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와 미국에 비자 없이 다음 주에 훌쩍 떠나는 방법은 관광, 출장밖에 없고 90일 이상 현지에서 머물 수도 없다.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고자 하는 로맨틱한 설정의 배경으로 프랑스는 이제 진부하다. 우리나라 기업은 미국 여러 도시에 지사를 설립하는데 정작 뉴욕에는 별로 없다. 대개 뉴욕 맨해튼에서 허드슨강 저 편 뉴저지에 사무실을 잡는다.
우리 사회 엘리트도 선거에 지면 즉시 해외 유학을 떠난다. 민초들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듯,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엘리트 버전의 은둔이 유학인 셈이다. 세계 유수의 대학에 가서 갑자기 무얼 어떻게 연구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사람들은 귀국도 무시無時로 한다.
마당발:
주인공 범죄자는 총상을 입어 위급한 상황에 처해도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든든한 야매 의사 친구가 있다.
주인공 형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찾아가서 엄포를 놓고 정보를 캐낼 전과자 몇 명 정도는 거느리고 있다.
우리 사회 엘리트에게 네트워크는 필수적인 자산이다. 혈연, 학연, 지연, 직職연 등 하나도 각별하지 않은 참으로 유치한 인연이 이들의 권력과 지위를 강화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연줄로 얽힌 엘리트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는 부정부패 품앗이는 인맥 관리의 중요 목적이자 도구이다.
영화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왜곡된 거울처럼 우리에게 허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