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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고 觀我齋稿] 번역 : 홍교하洪交河 중주령공

원문 34-35 페이지

by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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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고 觀我齋稿'는 조선 후기의 문신 조영석趙榮祏 (1686, 숙종 12~1761, 영조 37 )의 시詩·서序·기記·제발題跋 등을 수록한 시문집입니다. 책에는 18세기 한국의 시·서·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저자 조영석은 물론 정선·이병연 등에 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1984년에 필사본 2 책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영인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했습니다.

번역 습작입니다.


홍교하洪交河 중주령공重疇令公[1]이 금관자(金圈)[2]를 읊은 시에 차운하고 서문을 붙이다.


(서문)

금권은 실로 명종과 선조 두 조정의 어전御殿에서 쓰이던 것이다. 인목대비가 일찍이 영안도위공永安都尉公[3]에게 하사했고, 판서공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 교하공이 천릉遷陵[4]의 공로로 가선嘉善[5]으로 승진하면서 이 금권을 다시 착용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옛날 회계공주會稽公主[6]의 납포오衲布襖(누비옷)[7]는 비록 경황후敬皇后가 하사한 것이나 천명과 덕徳에 맞는 복장이 아니었고, 이위공李衛公[8]의 옥대는 진실로 전해오는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보물이지만 자손이 일개 현승縣丞[9]에 머무르며 곤궁하여 다만 궤짝 속의 장식품이 되었을 뿐이다.


지금 이 금권은 백 년을 거쳐 삼대에 이르러도 높은 벼슬이 바뀌지 않고 영광스러운 장신구가 면면히 전해지니, 어찌 단지 물건이 오래되었을 뿐이겠는가. (그 의미 또한 멀리 전해짐이로다.)


(시)


금권(금관자)은 부용처럼 그 강건함을 새겨서, 지금도 여전히 궁중 향로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선대 임금의 오랜 보물을 동조東朝(대비)[10]가 하사했으니 맑은 물에 해와 달이 깊이 스며들었다.


도위都尉 (홍주원洪柱元)가 조정에 나갈 때 은총이 함께 빛났고, 상서가 신을 끌며 행차할 때(曳履)[11]물건이 더욱 광채를 더한다.


쌍백당에 어젯밤 달빛이 경건히 비쳤으니, 삼대의 영광이 전해져 마땅히 드러내어 널리 퍼지게 하리


(원문 중 주석) : 홍령(홍중주)의 당호가 쌍백당雙柏堂



[1] 홍중주洪重疇, 조선 중기 유학자. 파주 교하 交河 군수를 지냄

[2] 금으로 만든 관자貫子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

[3] 조선시대 문신 홍주원洪柱元 추정.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짐

[4] 왕실의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5]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

[6] 중국 동진의 공주, 검약으로 유명.

[7]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황제인 문제(文帝)와 그의 누이인 회계공주(會稽公主)에 관한 일화. 당시 황실에서 검소함을 얼마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는지를 보여줌

[8] 중국 당나라 초기의 명장, 큰 공을 세워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짐.

[9] 縣丞 : 중국 관직명, 전국시대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縣令을 도와 縣政을 관장했던 하급 직위

[10] 東朝: 한대漢代에 황태후皇太后가 머물던 장락궁이 황제의 거처인 미앙궁未央宮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동조는 공간뿐 아니라 그곳의 주인인 대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고사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에서 동조는 대부분 대비를 가리킨다.

[11] 曳履 조복을 갖춰 입고 위엄 있게 걷는 모습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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