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노래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경아 Dec 24. 2021

[노래 소설]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

눈이 비처럼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나는 첫사랑과 재회했다.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 노래듣기(오존 버전)


도로가 주차장처럼 변해 있었다. 아침에는 아무 생각 없이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알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더구나 하루 종일 꾸물거리던 하늘은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심심치 않게 흩뿌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차들은 거북이걸음이라도 아주 조금씩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더듬더듬 가다 보면 언젠가는 집에 도착할 거라 생각하며 현 상황을 체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료하단 생각이 들어 평소 듣지도 않던 라디오를 켰다. 다행히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음악이 흘러나왔다. 요즘 노래가 아니라 옛날 발라드 노래였다. 이상한 것은 신나고 비트 있는 음악을 좋아하던 내가 채널을 돌리지 않고 그 음악을 계속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가수의 음색이었는데 가수의 이름도 제목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노래의 가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차창에 떨어지는 눈이 스르르 녹아 버리듯 내 마음도 그 노래에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목이 멘다는 생각이 들더니 갑자기 눈송이보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상해 보였는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었다. 민망함에 눈물을 훔치며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창밖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하던 첫사랑과 자주 갔던 카페가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억은 아직도 첫사랑의 잔영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노래 제목도 모르는 이 노래 때문일까?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자꾸만 반복되는 노래 가사의 의미가 문득 궁금해졌다. 왜 기억이 사랑보다 더 슬픈 걸까?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첫사랑도 어김없이 변하고 퇴색된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들을 후회하며 혼자 가슴을 치던 이별의 순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오늘처럼 이상한 날 문득 떠오른 사랑의 기억이 사랑보다 더 애틋하게 여겨지는 걸까? 그 기억이 그리운 걸까?


누군가는 옛사랑을 우연히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이별을 했던 그때의 나는 우연이라도 그 사람을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그리움에 마주하게 된 첫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비극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를 떠난 사람이 행복해 보여도 가슴 아플 것이고, 행복하지 않아 보여도 가슴 아플 것이다. 행여 나도 그 사람도 모두 행복했던 상황이라 해도 그 행복이 진심인지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헤어진 인연은 그대로 두어야 아름답게 기억될 거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달라졌다. 멀리 서라도 그 사람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라 믿는 이 노래 가사처럼 사랑에 목숨 거는 순정파는 아닐지라도 함박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기적처럼 그런 일이 일어나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쿵!"


지나치게 낭만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던 걸까? 살금살금 움직이는 차량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나는 갑자기 멈춰 버린 앞차의 범퍼를 세게 받아 버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속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급하게 비상등을 켰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앞차 운전자의 짜증과 욕설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손을 싹싹 빌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 자동차 문이 성이 난 것처럼 열리더니 키가 큰 남자가 차에서 힘차게 내렸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나도 따라 얼른 차에서 내렸다. 욕을 하진 않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이미 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무렵, 이상했다. 그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운전을 도대체........"

 

오늘 같은 날은 한 번쯤 멀리서 지켜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만큼 내 마음에서 내어 놓지 못한 그 사람을 이런 날 이런 상황에 만나게 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화가 나면 머리를 박박 긁는 버릇이 있던 그 사람은 여전했다. 머리를 박박 문지르던 그 사람의 손이 힘없이 풀리는 것을 보니 그 사람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눈이 비처럼 내리는 크리스마스 오후,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첫사랑과 재회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이 재회가 당황스러웠는지, 아니면 차 안에 있는 그녀가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냥 가라는 손짓을 했다. 마치 귀찮은 동네 똥개를 내쫓듯이 성의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마도 이 난처한 상황에서 되도록 빠르게 빠져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죄송하단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아 지갑에서 명함을 건네주려 했지만, 그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더니 재바르게 다시 차에 타버렸다. 설마 나중에 뺑소니라고 신고를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다가 주변 차들의 경적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차 안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래는 끝이 나고 다소 경박한 라디오 광고가 낯 뜨겁은 내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아무래도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프다는 말은 너무 낭만적인 말이었을 뿐이었다.




#이문세 #기억이란사랑보다 #오존버전 #모두에게사랑과평화가있기를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이브의악몽 #첫사랑 #최악의재회

 





매거진의 이전글 [노래 소설] 이승윤의 "달이 참 예쁘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