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rey Oct 21. 2022

여자들

완전한 타인인 여자들, 그들은 언제나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부분의 여자에게는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다. 그 여자들과 눈을 마주쳤을 때,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 파장을 지닌 그의 범위를 조우한다. 나이가 많던, 어리던. 몸이 크던 작던, 목소리가 높던 낮던, 행동이 사려 깊던 무례하던. 여자를 좋아하던 남자를 좋아하던. 어떤 방식으로든 여자들은 내게 강력한 존재감을 행사하고, 내 기억 속에 더 오래 머무른다.



이렇게 내 의식은 남자보다도 불특정한 여자를 향하곤 하고, 나는 오로지 여자들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오래 궁리하고 멋대로 상상하다가 제멋대로 좋아해 버리고 거리를 두곤 한다. 내 성애가 투사되는 대상은 남성이지만, 정신에 깃들고 내 마음을 지켜주는 존재들은 여성들이다.


 대체로 남자의 행동에는 크게 의미를 두고 곱씹지 않는다. 순전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얘기긴 하나, 남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신비로운 구석은 없다. 여자들을 향한 그들의 시선 처리는 오직 욕망과 호기심에 따라 투박하게 양분된다고 나는 단정 지어버린다. 성적인 호기심 혹은 무례한 무관심. 그래서 오히려 나에게는 남자들의 행동이 지극히 납득 가능한 범위의 것들로 인식된다. 더 단순하게 설명되거나 답을 내겠다는 욕구 자체가 들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남자들을 인식하는 방식은 여자를 인식할 때와 몹시 다른데, 슬프게도 내가 남성에게 모든 조각을 내보이고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서 그렇다. 어린 여자를 거쳐 젊은 여자로 살아본 그간의 경험에 근거하자면 내가 이성애를 하고 상대도 이성애를 하는 한, 내가 남성 앞에서 경계를 풀기란 어려울 것이다.


온기가 있는 가슴과 자궁을 가진 바로 그 생물학적인 섹슈얼리티 때문에 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보이지 못하고 특히 남자들 앞에서 더 과평가되거나 저평가된다. 가슴이 주렁주렁 달린 무언가, 다정함을 중요한 속성으로 여기는 내 가치관은 나를 더 취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상냥한 성격에 더해 붙은 무언가 여성스러운 속성으로 내 존재가 덧씌워지고 다른 해석이 달린다.


그래서 나는 기능이 형편없는 non-유혹 모드를 켜고, 남성들 앞에서 더 가볍고 더 조심스러우며 더 겸손하고 소탈한 속성의 괴생물을 연기하게 되는데, 사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처럼 불편한 배역이다.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관계의 절반 동안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노라면-그리고 내가 그렇게 굴고 있다는 걸 한번 인식하고 나면-신경증에 걸릴 것처럼 내 존재가 아득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마침내 나는 진심으로 남자들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희망을 바란다. 그리고 더 안전하다고 믿으며 쉽게 애정하려 하고.
그래서 내게는 언제나 여자들이 더욱 복잡한 존재로 다가온다.



게다가 여자를 사랑하기는 너무 쉽다!


그저 몇 번의 대화와 눈 맞춤으로도 강력한 호감의 불이 켜지고- 나는 붙임성 좋은 강아지처럼 그 여자들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어 버린다. 배려의 신호를 몇 번 알아채고 나면 데이트의 부담을 가질 필요 없는 여자인 그를 한껏 애정 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을, 동료를, 친우를 사랑하듯이 여자들을 마음속에 두게 되면서 어떤 생각이 자라났다.


'여자들끼리 주고받는 애정에는 죄책감이 없고, 갑작스러운 종결이 없어. 계속해서 주는 마음이 가능해.'

'대신 미워하는 것도 너무 쉽지.'


내게 연민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대부분 여자다. 고로 나를 정말로 실망시킬 수 있는 존재들도 오직 여자들뿐이다.

어머니, 동생, 친구, 동료, 선배, 동기, 고용주, 우상, 낯선 사람, 조카와 비슷한 관계를 맺은 여자 어린이,
그리고 나.



여자들은 파이처럼 결이 많고 깊은 데다가 모양도 잘 낸다. 여자들은 더 강력하게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더 미묘하게 미워할 줄 알며, 참을성 있는 단역 배우처럼 불평불만 없이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처리해내면서 솜씨 좋게 호감과 혐오를 화해시킬 줄 안다. 그래서 여자들은 특별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산다.

 

한쪽엔 내가 별 이유 없이 먼저 좋아해 버리는 여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엔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여자들이 있다. 우리는 같은 트랙을 달리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같은 운명에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계속 쪼개지고 뻗어가면서 필요 이상의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고 중요한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어서 반목하는, 흥미롭고 특별한 각각의 여자들이 된다.  


나와 닮은 면이 있는 여자들을 발견하고 멋대로 사랑해버리는 탓인지 성향이 적대하는 여자와는 너무 쉽게 불화해버린다. 어쩌면 그들도 그럴 것만 같다고. 종종 생각한다.




협력하는 여자들이 있고 반목하는 여자들이 있다. 반사적으로 여성 편을 들고 연대를 외치는 여자들이 있고 “나는 페미 같은 거 안 한다”고 또렷하게 말하는 여자들이 있다. 몸피가 얇은 여자들이 있고 몸집이 큰 여자들이 있다. 연애 경험을 전시하는 여자가 있고, 은밀하게 감추는 여자가 있다. 가슴과 엉덩이가 커다랗고 올라붙은 여자가 있고, 가슴과 엉덩이가 조그만 여자들이 있다. 그 어디에도 해당을 거부하고 판을 나가버리는 여자들도 드물지만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득한 숫자가 찍힌 번호표를 받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무명배우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곁눈질하는 나는 언제나 여자들 사이에서 괜찮다는 감각을 찾아 헤맨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내가 여기 있어도 되겠죠?


나는 우리가 같은 편이어야 한다고 믿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순진한 희망사항일 뿐, 여전히 저 밖에는 이를 드러내고 나를 노려보는 여자도 있다. 우리가 경쟁자라고 굳게 믿고, 내가 자기 앞발에 쥔 고기를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며 그걸 보란듯이 입에 물고 으르렁대는 표정을 지으며-남성 권력자에게 뒷걸음치듯 다가가는 여자들이 있다.


글쎄, 당신 고기를 뺏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힘을 위탁하려는 그 사람일걸. 나는 또 슬퍼하면서도 멋대로 미워한다. 언젠간 그 여자가 배부른 남자 입으로 자기가 가진 마지막 고깃 조각을 넣어주려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하면서.


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원하지 않는 싸움을 준비한다. 주어진 자원과 외모, 스탯을 토대로 무엇이 전략적으로 잘 맞아떨어질지, 부단히 의식적인 셈을 거쳐 무난한 위장을 뒤집어쓰고 괜찮은 여자인 척한다. 주류사회가 내놓은 미의 기준에 따라 내 몸을 맞추고, 여자들의 돈과 불안을 잡아먹는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안전한 경계에서 머문다. 그래도 가슴이 적당히 커서 다행이야, 내가 취향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회가 멀쩡하다고 허용한 것들이라서 다행이야. 하고 조그맣게 피어오르는 비열한 생각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적극적으로 가부장제의 빛나는 트로피로서 수지맞는 거래를 점치는 경쟁력 있는 여성들도 있는데, 나는 미모와 자원이 여성의 권력이라고 믿는 퀸비-추종 그룹에도 융화되지 못하고 겉돈다. 옷에 짓눌리는 살을 없애고 싶어 하면서도 ‘살 빠졌네?’라는 말을 불편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도록 각성한 탓에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색해한다.


나는 다른 쪽의 여자들을 본다. 눈매가 심술궂고 피부가 거칠고 뿡뿡이처럼 빵빵한 볼을 가진 여자들을. 퀸비 그룹은 아니지만 그들못지 않은 욕망과 자의식을 가진 개체들을. 그 중에서도 샘이 많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습관이 있고 술을 좋아하는 여성들과 싸움을 벌인 일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존재하는데, 앞서 기술한 특성을 가진 인간 중 한쪽의 성별을 가진 개체들과 계속 불화했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선명한 적대감을 표시한 그들이 무례하다고 여겼다. 나는 선빵을 친 적도 없는데 공격 받는다고 지나치게 분개했고 그들은 나를 재수 없다고, 자길 무시한다고 오해했다. 무시라니, 나는 사실 너를 경멸한 걸. 그게 그거인 줄도 모르고 나는 또 그 여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몸과 권력과 긍정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사적으로 사려 깊게 구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굴게 된다.  '여성스럽게' 굴려고 애쓰고,  소탈한 척하고,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것이 불편한 과시가 될까  걱정하고. 그들의 사려 깊음을 흠모하면서도 몸이 만든 굴레 때문에 어쩔  없이 '엄마 포지션'이나 '광대 포지션' 선택하게  이유를 남몰래 생각해번다.


나는 감히 주제넘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여자들을 향해 기꺼이 욕망하라고,  말할  있다고, 당당하게 원할  있다고 말을 이어가지만, 그러면서도 책임감 없이 공허한 말을   있는 나의 심적 자유가 안도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윽고 특성이 불화하는 여자를 실제로 마주쳤을  내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했는지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정말  여자가  앞에서 적극적으로 욕망과 통제력을 표현했을 , 남자들이 하듯이 과시하고 이기려 했을  품었던 불쾌감도 상기하며  위선을 맞닥뜨린다.  또한 결국 공격성을 지닌 여자들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H&M에서 스몰 사이즈 상의에 몸을 집어넣고 튀어나오는 살이 보이지 않았을 때 내가 은밀하게 품었던 통제감과 뿌듯함이 되살아나고, 창고에 숨긴 보기 싫은 물건을 마주했을 때처럼 문을 닫는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지극히 편협하고, 나 자신조차와도 불화하는 아무래도 그런 여자다.

자기가 지닌 공격성을 굴곡해서 표현하는 나와 같은 여자들만 찾아 헤매는.


작가의 이전글 영화관이 이랬었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