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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rey Oct 27. 2022

햇 노동아리 이야기 (상)

지랄발광 18세와 일터로서의 파리바게트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열여덟 살 때다.

아마도 초겨울쯤?


알바를 하게 된 배경을 회상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머릿속은 고등학교 교무실로 향하고, 교무실 배경 앞에 하단 자막으로 'Previously on mad fledgling worker' 뜨면서 여자 성우 목소리가 울린다)



“저 그래도 수도권 대학으로 원서 내려고요, 논술 전형으로.”

"안돼."


그분의 데이터베이스에 내신 3등급 이하로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논술 준비도 하고 대외활동도 하는데요.
최저 과목이 2개인 학교도 많아서 맞추면 할만할 것 같은데."


대답대신 기가차다는 헛웃음만 돌아왔다.


지난 1년간 내 성적표가 팔랑팔랑 넘어갔다.
미심쩍은 성적의 10월 모평 점수 앞에서 선생님 손이 멈췄다.


"안된다고."


선생님은 눈앞의 골칫덩이가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됐다고 신속하게 판단한 후, 평소처럼 노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오래오래 바라보더니 나가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기 전에 침착하게 집에 전화를 걸어서 교사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공주사대 출신으로 천안 서북구 00고등학교 4년차 영어교사로 재직하셨던 이 00 선생님.

'여교사는 사짜 남자랑 결혼할  있어' 수업시간에 주창하던 그분은 정말로 3 담임을 맡은 해에 남쪽 지방의 의대 재학생과 웨딩마치를 올렸다. 지금은 30 후반이 되셨겠군요. 행복하시길 빕니다!



집에 왔더니 엄마가 사자후를 시전 했다.


“너희 담임이 또 전화했더라.” 나는 왜-대신 방으로 살금살금 도망친다.

“그따위로 할 거야? 그럴 바엔 콱 공순이나 되어버려.”


이런 18세.

미성년의 길을 성공적으로 지나 독립을 쟁취하려면 우선 고3을 무사히 지나야 했다.

2014년이라는 스핑크스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동을 승인받으려면 증명이 있어야 한단다.
이 집에서는 학생 비자만 내주는 것 알지? 자, 무슨 수로 여기를 떠날 테냐?



상고에 진학한 친구들이나 공부와 영 척을 진 동급생들 중에는 빨리 돈을 벌기 위해 일찍이 알바를 시작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마 그 안에도 각자의 형편과 사연이 있었겠지만. 아르바이트가 어른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도 되는 듯 어서 돈을 벌어서 성인의 비밀을 남보다 빨리 달성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학교 쉬는 시간에는 여자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버블 같은 게 생겨서 비슷한 애들끼리 묶였다.


진학 교육이 형편없는 공립 고등학교. 한쪽에는 그나마 좋은 내신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책을 펼친 여자애들이 필기노트를 노려보다가 같이 화장실에 갔다. 다른 한쪽에선 거울과 화장품 파우치를 서로 풀어놓은 아이들 사이에서 사교가 한창이었다.  <알바 구하는 -롯데리아뿐인가?>, <어른처럼 보이는 요령- 편의점에서 담배가 뚫리더라>, <번외: 주말에 만난 대학생 오빠> 같은 주제로 열띤 정보교환의 장이 열렸다.  사이에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놓고 책을 읽는 나는 어느 쪽의 여자 아이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혼종이었다.


그래도 나는 승산이 있는 방식을 찾아서 꼭 나갈 테다. 지랄발광 18세는 생각했다.


산삼같은 거 고아먹으며 학업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기가 고3이랬는데. 어른들이 네 인생이 결정되는 기간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 중요한 시기에 알바를 시작한 데는 나름의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급식을 안 먹었고 집밥은 맛 없었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가스불을 켜놓고 자리를 비우는 기상천외한 버릇을 갖고 계셨는데, 요리를 할 때도 이 습관이 적용됐다. 김칫국은 김치 전골이 되었다가 재맛이 나는 김치 볶음이 되었다. 일주일에 2번 꼴로 냄비를 태운 결과 튼튼한 스텐 팬만 살아남았다.
식탁에는 탄 맛이 나는 음식 혹은 거의 안 볶인 음식이 자주 올라왔다.


 조절을 하는 재주는 없지만 플레이팅을 중시하는 모친 덕에 우리 자매는 200 역사를 지녔다는 영국산 도자기에 엄마가 볶음밥이라고 우기는, 오이와 감자가 들어간 미지근한 섞음밥을 배식받는 불행한 호사를 누렸다. 맛이 없어 도저히 참을  없는 날이면  몫의 음식을 아주 빠르게 먹어치운 다음 배가 아픈 척하고 화장실로 가서 몰래 속을 게워냈다.


이 시기의 엄마는 입시에 집중해야 할 장녀가 요리 같은 것이나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끔 엄마가 기분 좋은 날에 내가 눈치껏 요리를 했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가모장의 권력 앞에 정면 돌파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꼼짝없이 엄마가 만든 밥을 먹었다. (하지만 설거지는 하도록 두시더라)


하룻밤을 꼬박 불린 냄비에서 검댕을 철수세미로 닦아내며 엄마 몰래 온갖 욕을 했다. 그즈음 나는 더즐리네 집에 붙어사는 해리포터처럼 행세하며 책상 서랍에 초코파이 같은 것들을 감춰놓고 매일 조금씩 꺼내먹으며 내 혀에게 사과했다. 이건 탄 음식 대신이야. 나쁜 음식만 넣어줘서 미안. 좋은 음식도 아니었건만 그즈음 내 혀는 집밥보다 싸구려 간식을 좋아했다. 매주 귀갓길에 마트에 들러 할인하는 몽쉘과 젤리 같은 것들을 우르르 쏟아 넣는데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한 끼는 맛있는 밥을 사 먹어서 울적한 기분을 잊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안 궁금하겠지만 둘째, 영화 티켓 값을 비롯한 문화생활비가 필요했다) 고등학생 주제에 모든 마블 영화 시리즈를 극장에서 보았고(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기 위해 개봉 주에 영등포 스타리움관으로 원정을 갈 정도로 미쳐있었다) 거기에 청불 딱지가 붙은 아트하우스 상영관까지 기를 쓰고 들어가려 했던 약간 돌은 입시생이 나였다. 삥땅 치는 용돈으로는 그 티켓 값이 다 충당이 안 됐다.
 
 


그래서 알바몬을 깔고, 다니고 있는 학원 스케줄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비자금을 만들 수 있는 근무시간대의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롯데리아는 안된다. 그건 평일 저녁을 쪼개서 시킨다. 디스코 팡팡도 안된다. 하루 만에 나는 녹을 것이다. 편의점, 편의점은 고등학생을 잘 뽑아주지 않았고 보통 집이 가까운 사람들을 채용해서 나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아직 인구가 많지 않은 도보 30분 거리의 동네의 파리바게트에서 일요일 오전 7시-오후 3시 타임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이도 18세부터 가능했다. 이거다!


바로 문자를 보냈고, 요청대로 얼굴 사진을 보낸 뒤 면접 시간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사장님은 배방-천안 지역에서 여러 개의 상가를 소유한 건물주의 아들로, 결혼도 일찍 한 30대 남성이었다. 오후 4시쯤 매장에서 면접을 봤고, 인상이 서글서글하다는 피드백과 함께 바로 다음 주부터 누가 입던 빠삐용 티셔츠와 회색 빵모자를 지급받아 파리바게트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주말을 굉장히 극단적으로 쪼개 쓰고 있었다. 토요일은 천안에서 고속버스 타고 대치동까지 가서 입시 논술 지도를 받고, 강남 7 학군 출신 남학생들과 수포자 구제 학원에 다녔다. 그러고 쫄래쫄래 다시 밤차 타고 천안에 와서 일요일 아침 7시부터 낮 3시까지 알바를 하는 식이었다.
 
 엄마가 알면 또 길길이 화를 낼 것이 분명하기에(이 대목에서 또 메아리가 울린다. 너-미쳐-버린 거야!-어딜-감히-그렇죠! 어머니 나는 항상 약간 돌아있었어요 엄마 닮아서.) 매주 일요일,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으로 보충 공부를 가는 척하고 실제로는 도서관 옆 길을 쭉 따라 반대 방향으로 30분을 걸어서 신시가지 근처 고층아파트 단지에 있는 파리바게트로 출근했다.
 

제빵 기사와 생산라인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로 규탄받는 지금의 파리바게트를 알기 전인 2014년,
미성년이었던 나에게 그곳은 썩 좋은 일자리였다.


오전 6시 30분,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직 어두컴컴한 겨울 아침에 집 옆에 있는 월봉산 근처를 주욱 걸어가면 온갖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또 지각하는 것, 평생 이곳에 눌러앉게 되어 모친이 만든 해괴한 요리를 먹는 것, 의아할 정도로 나를 선명히 미워하는 담임 선생님이 말한 대로 주제넘게 높은 곳을 바라봤다가 보기 좋게 실패하는 것, 이번에야말로 결국 납치당하거나 강간당해 죽는 것….


컴컴한 하늘에 퍼런 빛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안개를 뚫고 아파트 단지에서 나오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좀 더 걸어 나와서 내 입에서 나온 뿌연 입김이 잘 보이지 않게 될 즈음이면 어두컴컴한 아파트 단지 앞에 노란 불을 켠 파리바게트가 보였다. 가장 먼저 출근하는 제빵기사님이 매장에 불을 켜 두고 생지를 굽고 계실 거였다.


그 빛을 보고 현실적이지만 극단적인 생각들도 흐려졌다. 대학이라던가. 가족이라던가. 남자애들이라던가. 아무튼 그런 것들은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것들이었다. 당장 할 일이 저기 있었다. 임금을 받기 위해 모드를 바꿀 시간이다.


나는 조금 더 빨리 걸어갔다. 출입문 옆에 내 키보다 높게 플라스틱 박스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따 내가 하나하나 들여서 식빵과 모닝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곰돌이 모양의 캔디와 손바닥 크기만 한 미니 케이크 같은 완제품을 진열해야 할 것들이다. 나는 박스의 높이를 보며 오늘 정리해야 할 재고품의 양과 종류를 짐작한다.


오늘은 진짜 높네. 케이크가 많은가.

며칠 새 잘 팔렸나 봐.   


이런 생각을 하며 온도차 때문에 뿌옇게 된 문을 연다. 현실적이고 냄새가 있고 온도가 있는 진짜 생각과 일들을 마주하며 걸어 들어간 매장에서는 옅은 커피 냄새와 밀가루 냄새와 물내 같은 게 났다.


저의 생각보다도 길고 웃픈 이야기가 되어가서
반쪽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 마저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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