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반려동물을 키울 수 없는 이유
복슬복슬, 성큼성큼, 산들산들, 고롱고롱. 호기심 많은 눈을 반질반질 빛내는 털친구들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나도 동물을 약간 좋아한다. 모든 동물에게 공정하게 애정의 시선을 보내는 박애-니멀주의자는 아니고. 그냥 그중에서도 털친구들이 특히 멋지고 영리하고 냉정하고 귀엽다고 생각한다. 근데 엄청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고 같이 살면 쓸모 있는 룸메이트가 될 수 있는 수준만큼만 책임질 수 있어서 ‘약간 좋아한다’ 고만 말할 수 있다.
털친구를 위해 매일 밥도 가져오고, 물도 갈고, 응가도 치울 수 있는데, 정기적으로 병원에 데려가거나 발톱을 자르려고 시도하다가 매번 물려가면서도 그 일을 놓치지 않고 반복하는 건 자신이 없다. 냉정히 보자면 나는 어떤 생명체의 보호자가 될 정도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털친구가 날 물고 할퀴어도 늘 평온하고 일정하게 행동할 책임감도, 그 애를 교육시키고 존중을 얻는 데 성공해서 어엿한 성체로 행복하게 돌볼 배짱도 부족해서 그냥 동물을 약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다른 털친구를 보면 그냥 싱겁게 ”이야, 너 최고다!” “으아, 얘 귀엽다!” 하고 만다.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들을 보면 흔히 자기를 엄마, 아빠로 부르곤 하던데. 그것은 어떤 마음일까나. 나도 어떤 털 친구들과 같이 살았던 시기가 있지만 한 번도 반려동물의 어버이였던 적이 없다. 약간의 권위를 지닌 계부나 계모 같은 역할을 한 적도 없어서 아마 살면서 잠시 동거한 모든 털친구들에게 나는 가끔 밥을 내오는 그들의 서열 낮은 친구였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황구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털친구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집 마당에서 키웠던 황구다. 어릴 때 나는 동물을 잘 알지도 못했고 오히려 무서워했던 거 같다. 황구는 따로 이름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개’라고 지칭했고 나는 그냥 멍멍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동물이라면 질색했는데, 식구들은 어쩌다 그 녀석을 데려왔던 걸까? (왠지 하숙하던 삼촌들 중 하나가 데려왔을 거 같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황구가 갇혀 있던 모습만 생각난다. 산책을 나간다던지 집안에 들였다던지 하는 그런 정다운 기억이 없다. 내가 살던 집 마당 우측에는 한평 너비 정도 되는 돌계단이 있었는데 황구는 그 자리에 둔 철제 케이지에 살았다.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황구는 몸집이 컸다. 어린이였던 내 머리통과 머리 사이즈가 비슷했고 키는 가슴팍까지 왔다. 가끔 삼촌들이 문을 열어주면 들개처럼 마당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그게 무서워서 2층 베란다에 멀찍이 떨어져서 ‘멍멍이’가 움직이는 걸 보곤 했다.
어느 날은 용기가 났는지 혼자 멍멍이를 보러 갔다. 오늘은 내가 밥을 줄 거야. 그럼 우리는 친구가 되겠지. 나는 다시 아이가 되어 마당으로 가던 모습을 상상한다. (너무 오래되어서 이 기억이 진짜인지 반쯤은 지어낸 것인지 알 수 없다) 눈이 반질반질하고 누릿한 냄새가 나는 황색 개가 철창 사이로 어린이를 바라본다. 멍멍아 안녕. 나는 틈 사이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볼까했지만 킁킁대는 모습이 무서워서 말았다. 밥을 주려고 문을 열었다. 우리가 친구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케이지가 열리자마자 황구가 펄쩍 뛰쳐나왔기 떄문에. 내가 뭘 기대한 거지? 멍멍이는 이 집에 미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개는 빠르게 달려서 어린 나를 제치고 달려 나갔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으앙! 멍멍이가 도망갔어! 키우던 개가 나 때문에 도망치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나를 혼내지도 않았다. 멍멍이와의 기억은 그게 끝이다.
우리는 그 뒤로 개를 찾지 못했다. 빈 케이지는 빨간 벽돌집 마당에 한동안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문득 자라면서 식구들이 일부러 개를 찾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언젠가 엄마는 탈출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차를 타고가다 길가에서 우리 개를 봤다고 말했다. 선봉에 서서 다른 유기견과 나란히 달리는 모습을 봤다며, 그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고 했다. 엄마는 이 얘기를 하며 그 개가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군가 멍멍이를 데려가서 드디어 행복한 가정을 만났다고, 그래서 천수를 누렸을 거라고 순진한 결말을 부여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정 버려진 것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나.
성인이 되기 전에 가끔 멍멍이를 떠올렸다. 멍멍이는 숲으로 갔을까? 산으로 갔을까? 유기견의 왕이 되었을까? 어떤 인간들은 개를 잡아가는 습성이 있다.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한 들로 가기에 멍멍이는 너무 큰 개였다. 발이 닿는 모든 길이 털뭉치 짐승에게는 위험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반려동물 기억은 그런 식이다. 어린아이의 부정확한 기억과 어른의 하얀 거짓말로 만들어진 부슬부슬한 죄책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