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일을 무척 사랑했다. 내 일이 좋았다. 나의 회사도 좋았고,직장 동료들도 하나같이 다 좋았다. 그렇게 난 15년 직장 생활을 했고, 그중10년을 워킹맘으로 살았다. 그러나 회사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힘든 고비가 여러 번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의 에너지가 쓸데없는 고민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일도 육아도 당연히,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제대로 한다는 게 뭘까? 지나고 보니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도,결국 일과 육아 둘 다 100% 만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쁜 회사 일정과 육아로 혼자 몸 닳아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였을까. 고비고비 마다 친정엄마와 아빠가 힘이 되어주시고 바쁜 나를 대신해 우리 두 아이를 대부분 돌봐주셨다. 물론 나 신랑도 있는 뇨자다. 그런데 신랑은 출장, 야근, 시험 등으로 항상 나보다 더 바빴고, 당연히 주중에는 아이들도 아빠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씩 받게 됐고,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도 친정엄마는 두 손자를 정말 넘치는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아마 나보다 두 손자에 대해 더 많이 아실 것이다. 감사하게도.아이들 역시 엄마인 나보다 할머니와 더 친밀하고, 할머니와는 비밀 이야기도 다공유하는 사이가 됐다.나는 내 일이 좋아서 놓을 수 없었다. 욕심이었을까. 내 일과 육아에 밸런스를 맞춰보려고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둘 다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는 것 같았고, 이런 상황이참 힘들었다. 두 가지 다 잘하고 싶었으니까.결국 내 욕심, 내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엄마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것.
할머니가 계속 식사는안 하시고가스활명수만 드신다고,9살 큰 아들 녀석이 나에게 제보를 해줬다. 뭔가 느낌이 싸했다. 엄마에게 병원에 가보자고 했더니, 극구 사양을 하신다. 원래 병원이라면 질색하시는 분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얼마 후, 엄마에게 회사에서 공짜로 직원 가족들 건강검진을 해준다고 했다. 공짜인데 안 하면 아까우니, 엄마랑 나랑 데이트할 겸 나 휴가 쓰고 같이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내 손에 이끌려함께 건강검진 센터에 방문했다. 그날 바로 위암이 의심된다고 대학병원에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진작에 뭔가를 느끼고 계시지 않았을까.그리고 서울대학병원에 급하게 예약하고 검사를 받았다. 정말 믿고 싶지 않았고, 아닐 거라고 수도 없이 부정했지만, 엄마는 정말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날 너무 괴로웠다. 난 좌절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혼이 다빠져나가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엄마 앞에서는 절대 심각해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태연한 척, 애써 담담한 척, 자연스러운 척, 수술하면 괜찮다고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발연기인 나의 '척'은 엄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세도 있으신 엄마가 천방지축 두 손자를 10년 동안 봐주시느라얼마나 힘드셨을까.나 자신이, 그리고 신랑도너무 원망스러웠다. 우리 둘이 책임져야 할 일인데, 그동안 엄마에게 너무나무거운 짐을 드렸던 건 아닐까.세상에 이런 불효가 어디 있을까. 엄마한테 고마웠던 감정이 모두 미안한 마음으로 번졌고, 나 스스로에게 실망스럽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는생각마저 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난 것 같았고, 차디찬 바람이 계속 들어가는 것 같았다.한없이 마음이 시렸다.
미국에 와서 얼마 안 된 어느 날 밤.아이들이 잠자기 전에나는 한국에서 매일밤 하던 대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아이들은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둘째 아이는 이 시간이 포근한 이불 같아서 좋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10년째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불을 끄고 굿 나이트 인사를 하는데, 정 많고 감성이 풍부한 둘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우리 할머니 숨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러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요."나의 엄마는 나에게도 엄마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이상이었다. 먼 미국땅에서 아직 적응 중인 나는 요즘 더 많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내가 아이를 품어보고 키워보니, 이제 엄마 마음을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