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는 전보다 빨라지고 나의 시간 또한 고속열차처럼 서둘러 달려간다. 1분 1초를 온전히 느끼고 곱씹으며 살았던 나 혼자만의 삶은 아내를 만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처럼 호흡을 맞추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아이가 생긴 후로는 아이가 나의 우주이고 달력이 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에 일어나 딸의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한다. 긴 팔 옷과 마스크로 아이를 중무장시키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차 창으로 바스락거리며 스며드는 햇살은 유난히 선명하고 코 끝을 스치는 바람은 부드러운 듯 매섭다. 아이의 눈빛이 머무는 곳곳은 계절의 색으로 물들어 있고 아침마다 인사를 건네던 감나무는 한 껏 무거워진 열매들을 한 아름 매달고 있다. 더불어 아이의 맹맹해진 콧소리는 계절이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한 번 더 실감하게 한다. 그렇게 감기의 계절이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아이의 상태가 신경 쓰였던 나는 하원 후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약간의 콧물만 있는 정도여서 간단히 약 처방만 받았고 그렇게 아이도 금세 좋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갑자기 아이의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밤 새 40도 가까이 오르는 열을 물수건과 해열제로 간신히 다스리며 한 고비를 넘겼다. 놀란 가슴의 아내는 내심 병원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병원이 능사가 아니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날 밤, 회사 미팅 중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내였다. 열은 다시 39도를 넘기 시작했고 해열제가 듣지 않는다는 말에 우린 응급실 행을 결정했다.
좀 더 일찍 병원에 갔어야 했나, 이러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책의 화살이 되어 가슴에 콕콕 박혔다.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 응급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한 걸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어디 갔다 왔어. 얼마나 찾았다구.”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두 손으로 내 목을 놓칠세라 힘껏 끌어안은 딸의 한 마디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응급실에서 지쳐 잠든 희진이>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세상은 아랑곳없이 응급실의 밤은 환하고 분주했다. 울먹이는 아이를 품에 안은 부모들로 빽빽이 채워진 대기실의 공기는 계절의 온도만큼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 사이사이로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 없는 인사와 위로가 오고 갔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내 자식이고 아픈 나무이기에.
내 눈에 비친 아이들이 하나같이 이제 막 뿌리를 내리려는 작은 나무처럼 보였다. 그 뿌리가 무사히 자리 잡고 껍질이 채 단단해지기도 전에 무심하게도 빗줄기는 요란하고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그리고 이제 막 묘목을 심은 초보 농사꾼의 마음처럼 부모는 약한 비바람에도 쉬이 흔들리고 잠 못 이룰 것이다. 아프지 않고 크는 나무는 없다고 하지만 내 아이만큼은 그 흔한 모기 물림 하나 없이 키워내고 싶은 무모한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울음 한번 없이 씩씩하게 버텨내고 있는 딸보다 정작 상처가 두려운 건 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새벽 내내 이어진 검사와 치료에 지쳐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힘겹게 응급실을 나섰다. 택시 창문에 비친 내 두 눈이 밤 사이 걱정과 미안함으로 붉게 충혈돼 있었다. 문득, 어릴 적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배구를 하다가 네트 줄에 얼굴이 심하게 찢어졌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내 얼굴을 붙잡고 밤 새 펑펑 우시고는 다음 날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알로에를 한가득 들고 오셨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밤 새 내 얼굴 위로 그 커다란 알로에를 문질러주셨다. 자식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는 자책 가득한 그 손길과 눈물을 이제 부모가 된 나는 알 것만 같다. 나를 아프지 않은 나무로 키워내느라 정작 당신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그 절절한 사랑을 이제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부모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내일은 아픈 만큼 한 뼘 더 자라 있을 아이의 손을 잡고 약국에 들러 부모님께 드릴 마스크를 사야겠다. 거칠고 앙상해진 두 분의 얼굴 위로 찬바람이 들기 전에 작은 손길이나마 전해드리고 싶다. 아이를 통해 나의 부모님을 이해해가는 이 시간들과 함께 나도 조금씩 아빠가 되어간다.
# 싱어송라이터 조제의 띵곡 - 시인과 촌장 – 나무 (1988년, 3집 - ‘숲’)
우리에게 ‘가시나무‘로 친숙한 ‘시인과 촌장’은 하덕규와 오종수로 이루어진 포크 듀오입니다. 1981년 서영은의 단편소설 '시인과 촌장'을 따와 팀 명을 짓고 동명의 타이틀인 1집 '시인과 촌장'을 발표하며 데뷔하였습니다. 그 후 하덕규는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1986년 2집 '푸른 돛'을 발표하고 함춘호가 팀을 떠난 후 1988년에 3집 '숲'과 2000년 4집 'The Bridge'를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곡은 3집 앨범에 수록된 ‘나무‘라는 노래입니다. 아침 햇살과 같은 피아노 선율과 기타 소리 위로 음유시인 하덕규의 잔잔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포근한 나무 밑에서 잠시 쉬어가는 듯한 편안함을 안겨줍니다. 가사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처럼 저의 딸이,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티 없이 맑게 자라 튼튼한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길 바라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여쁜 꽃 피워
좋은 나라의 소식처럼 향기를 날려
그 그늘 아래 노는 아이들에게
그 눈물 없는 나라 비밀을 말해주는 나무
밤이면 작고 지친 새들이
가지 사이사이 잠들고
푸른 잎사귀로 잊혀진 엄마처럼
따뜻하게 곱게 안아주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