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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15. 2023

관사

관사


한글날이 끼인 3일 연휴를 인천 관사에서 지냈다. 얼마 전 긴 추석을 목포 집에서 보냈고, 대기 근무(비상이 걸리면 한 시간 안에, 사무실에 응소하는 체계)도 잡혔기 때문이다. 추석 때는 동료가 대신 해 줬는데, 이번까지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무를 핑계 삼아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기도 했다.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비디오 게임도 하면서 말이다.  


금요일 오후가 되자 직원들이 유연 근무를 쓰고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퇴근 무렵에는 서너 명만 남았다. 나도 여섯 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섰다. 관사까지는 6km쯤 된다. 차에 타면 유튜브나 라디오부터 튼다. 대개 정치 얘기다.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난다. 신경이 곤두설 때도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안 들으려고 한다. 오늘은 더 그랬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꿈꾸게 만드는 잔잔한 음악이 당겼다.


관사는 복도식 주공아파트 101호다. 우리 집 앞 벽에는 빈 병과 고물이 쌓여 있다. 옆집 할머니의 물건이다. 아파트에서 빈 병이 나오면 대부분 할머니 차지다. 며칠 전에는 경비실에 치워 달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할머니는 40대 아들과 둘이 산다. 최근에 많이 쇠약해졌다. 아들뻘 되는 내게 항상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존댓말로 인사한다. 막상 민원을 넣으려니 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며칠 전부터 가을 기운이 관사를 채웠다. 혼자 살아서인지 더 썰렁하다. 사람 소리를 들으려고 텔레비전부터 튼다. 결혼할 때 샀던 건데, 인천까지 밀려 올라왔다. 화면에서 검은 액정이 비치거나, 추워지면 잘 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19년이나 함께 살아서 정이 들었. 우선 할 일은 빨래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한다. 세탁기는 전에 같이 살던 형님이 두고 갔다. 아기 빨래 하는 소형 세탁기다. 혼자 쓰기에 딱 좋다. 옷에서 향기가 조금이라도 나게 하려면 섬유 유연제를 써야 한다. 헹굼이 시작될 때 넣는데, 그러려면 세탁기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빨래까지 널고 나면 집안일의 절반은 끝난다.  


요즘 가장 즐겨 보는 유튜브는 <노마드션>이다. 30대 남자인 그는 노마드(유목민)라는 이름답게 세계 오지를 여행 다닌다. 나도 20대 때는 바다를, 지금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신세다. 고향도 같은 전북이다. 그래서 그에게 더 정감이 간다. 마침 그의 영상이 올라왔다. 맥주를 마시며 봐야 제맛이다. 두 개만 사려다, 네 개를 집었다. 묶음으로 사면 몇 천 원 할인되기 때문이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또 다 비웠다. 나라는 인간은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오늘도 아낀 돈은 뱃살에 적립했다.


피곤이 몰려왔다. 안방에는 여름에 쳐 놓은 1인용 모기장이 그대로다. 치울까, 했지만 아늑해서 그냥 두었다. 텐트에서 자는 감성이 느껴진달까! 온열 매트에 드러누웠다. 장모님이 쓰던 건데,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침대 대용으로 좋다. 온도를 40도까지 올리면 노곤해진다. 오늘도 윗집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다. 울분의 발걸음 소리와 육중한 몸에서 전이되는 진동이 그대로 느껴진다. 2층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본 게 다다. 그는 새벽 한 시까지 악을 지르기도 한다. 상대방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사회를 향해 지르는 울분인가도 싶다. 나보다 더 피곤한 건 그 집 개다.


관사에서 식사는 끼니를 해결만 하는 수준이다.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 외식은 거의 안 한다. 삼겹살은 딱 한 번 구워 먹은 이후로 그만두었다. 상추, 고추, 쌈장까지 준비하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햇반부터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기분이 좋으면 계란 부침도 한다. 고구마 순 김치와 무 김치가 잘 익었다. 김과 참치 통조림까지 있으면 혼자 사는 40대 남자에겐 진수성찬이다. 햇반 용기와 수저를 씻는 물에 대충 행구면 설거지는 끝난다.


햇빛이 방안에 들어 차면, 뿌연 먼지가 더 눈에 띤다. 청소기를 돌리고, 방안을 싹싹 민다. 행거에 던져 놓은 바지 서너 개도 옷걸이에 건다. 몸은 힘들지만, 기분은 좋아진다. 이쯤되면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 같았는데, 따뜻한 게 당긴다. 커피숍의 노란색 의자와 탁자, 창밖의 노란 은행 잎이 잘 어울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보니 가을이다. 그것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지금까지 가을을 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살았다. 올해는 다르다.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외롭다. 주말부부를 4년째 하면서 많이 지친 것 같다. 문학산에 올랐다. 몸은 쓸수록 힘을 더 만든다. 저녁으로는 염소탕을 골랐다. 목포에서부터 염소탕을 먹으면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국물 맛이 깔끔하고 양도 푸짐했다. 수저를 드는 내내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기운도 나는 것 같다.  


주말 마무리는 다림질이다. 와이셔츠 서너 벌을 다려야 한다. 그 순간은 옷과 다리미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 깔끔하게 펴졌다. 인천 관사에서 마지막 가을은 그렇게 또 흘러간다. 내년이면 목포에 당분간 정착할 것 같다. 몇 년 있으면 또 유목민처럼 떠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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