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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7. 2023

고구마 순 김치

고구마 순 김치


우리 부부에게는 '명절 증후군'이 없다. 이 병은 음식을 만드는 데 쓰이는 노동과 친척과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 집은 작은집이라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명절 밥상에는 생선과 반찬 몇 가지가 더 올라갈 뿐이다. 그리고 그 가짓수는 조금씩 줄고 있다. 어머니의 건강과 비례하면서 말이다.


추석 전 날 시골집에 갈 준비를 했다. 아내는 큼지막한 꽃게와 대하부터 챙겼다. 시부모님에게 해물탕을 만들어 드릴 거라고 했다. 전날에도 아내는 해물탕을 요리했다. 엄지를 치켜세우는 데 힘이 꾹 들어갈 만큼 국물이 시원하고 깔끔했다. 살이 꽉 찬 꽃게를 씹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내는 내 표정을 보면서 다짐했는지 모르겠다.


시골집에는 저녁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아내는 꽃게부터 손질했다. 나는 상을 차렸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배추김치, 홍어 무침, 고구마 순 김치를 꺼내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뇌졸중이 온 이후로 전을 부치지 않는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육개장도 어머니에게는 버겁다. 올해는 송편도 사지 않았다. 그래도 시장에서 산 홍어 무침과 직접 담근 고구마 순 김치는 빠지지 않았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있다.


해물탕이 상 가운데를 차지했다. 아내는 어제보다 맛이 덜하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꽃게 살은 먹음직스럽다. 아내의 평가가 무색하게 아버지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어머니도 표정으로 맛을 평가하고 있었다. 두 분은 밥 한 그릇씩을 깨끗이 비웠다.


내 젓가락은 고구마 순 김치에 갔다. 잘 익어서 새콤하면서도 아삭아삭했다. 고구마 순 김치를 보면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한창 클 때 가장 많이 먹었던 반찬이다. 그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양푼부터 챙겼다. 따뜻한 밥을 듬뿍 담아, 잘 익은 고구마 순 김치와 비볐다. 거기다 참기름을 두세 방울 떨어뜨린다. 달걀부침까지 넣으면 최고가 된다. 그렇게 서너 달을 먹었다. 나는 고구마 순처럼 자랐다. 자기보다 키가 작다고 나를 우습게 보던 둘째 여동생도 조금씩 오빠 대접을 해 줬다. 뽀빠이에게 시금치가 있다면, 내게는 고구마 순 김치가 있다.


깔끔했던 시골집은 어머니가 아픈 이후로 먼지가 조금씩 쌓인다. 그릇에도 밥알이나 고춧가루가 묻어 있다. 그런 걸 볼 때면 서글퍼진다. 부엌 자그만 창 사이로 뒤꼍에 잘 자란 고구마 넝쿨이 보였다. 어머니의 거동 반경은 시간이 갈수록 줄고 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심어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고구마 순을 보며 가끔 나를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어둑해질 무렵 시골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또 고구마 순 김치를 싸 주셨다. 올 때는 설레지만, 갈 때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월이 갈수록 더 그렇다. 내년 추석에도 잘 익은 고구마 순 김치가 상에 올라올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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