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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Apr 06. 2024

나무를 심다

내 고향은 정읍의 한 시골 마을이다. 한때는 서른 가구가 넘었는데, 지금은 열 집 남짓 산다. 주민들은 대부분 일흔이 넘었고, 거동이 불편한 분도 여럿이다. 40년 전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동네 사람들은 거의 농사를 지었고, 슬레이트 지붕의 흙집에 살았다. 다들 형편은 비슷했지만, 내가 부러워하는 집들이 있었다. 아마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랬던 것 같다. 아파트 단지에 살구꽃이 만개할 즈음이면 그 추억도 아스라이 피어난다.


봄기운이 퍼질 무렵이면, 성진이네 집 뒤꼍에는 고개를 들어야 끝이 보이는 나무가 담홍색 꽃을 피웠다. 모내기할 때쯤이면 나무의 열매는 황금색으로 잘 익어 갔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똑같은 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선생님은 살구를 함부로 따거나 줍지 못하게 했다. 한꺼번에 따서 전교생에게 서너 개씩 나눠 주는 게 학교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성진이는 봄만 되면 부자가 됐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성진이네 담벼락을 두리번거렸다. 운 좋은 날이면 살구 서너 개를 주울 수 있었다. 흙먼지를 대충 털고 반쪽으로 쪼개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했는데, 먹고 나면 더 구미가 당겼다. 마트에 살구가 보이면 그때가 생각나 가끔 사지만, 예전 그 맛이 아니다. 살구 맛이 변한 게 아니라, 내 혀가 단맛에 길들어서일 것이다.


따뜻한 기운이 대지에 퍼지는 6월 말이면, 재원이 형네 마당에는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빨간 열매가 달렸다. 형은 가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날은 마음대로 보리수 열매를 먹는 날이다. 그즈음이면 형의 눈에 띄려고 집 주변을 서성였다. 잘 익은 열매를 한 움큼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시큼 떨떠름하면서도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씨는 기관총 쏘듯 친구들에게 후루루 뱉어냈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면 주완이가 주인공이다. 주완이는 아침이면 가방에서 자두를 꺼냈다. 연두색과 분홍빛이 돌았는데 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자두는 친한 친구들에게만 하나씩 나눠줬다. 지금도 자두를 보면 주완이가 떠오를 정도다. 주완이네 대문 옆에는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자두나무가 있었다. 진녹색 잎 사이에서 붉게 익어 가는 자두는 예쁘기도 했다. 감나무, 그것도 땡감 나무 한 그루밖에 없던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하면 가난해 보였다. 어른이 되면 우리 집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집으로 만들고 싶었다.


20년 전쯤, 시골집에 유실수를 심었다. 장날에 시장에 가서 살구나무, 보리수나무, 자두나무 같은 것들을 샀다. 봄이 되면 마당에는 예쁜 꽃이 피었다. 몇 년 지나서 탐스러운 열매도 열렸다. 열매는 새들이나 벌레들 차지였다. 나무에 가면 아이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기 딱 좋았다. 정말 맛있다고 주면 한두 개 먹고는 손사래를 쳤다. 어쩌면, 단 과일과 맛있는 과자가 넘쳐나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그 나무들은 모두 사라졌다. 비닐하우스를 짓는다고 베어지고, 해충이 생긴다는 이유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몇 년간,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멀리 발령이 나면서 시골집에 가는 횟수도 줄었고, 바쁘게 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올해 다시 나무를 심기로 했다. 12년쯤 지나면 정년이 된다. 요즘 들어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는 상상을 많이 한다. 무엇보다 시골집에 오면 마음이 포근하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을 보고, 진돗개와 산책하는 것도 재밌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이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고향집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앞집을 사서 텃밭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 마당은 동네에서 가장 넓다. 올봄, 나는 어릴 적 꿈을 다시 꾸고 있었다.


3월 마지막 주, 신안군 산림조합 나무 시장에 들렀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나무 심는 시기도 빨라졌다고 한다. 이번 주를 넘기면, 1년을 그냥 보낼 수도 있어서 조바심이 났다. 시장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시골에 있던 나무 들이었다. 구경하다 보니, 나무를 사야 할 이유가 하나씩 생겼다. 무화과나무는 고향 마을에 흔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열매 열리면 좋아할 것 같았다. 수국과 동백나무는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떠올라서 집어 들었다. 주문서에 적다 보니 열다섯 그루다. 차를 나무를 실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보리수 열매가 열리고, 동백꽃이 피었다.


시골집에는 어머니만 계셨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나무를 보며 즐거워했다. 심을 데를 알려 주고, 나무에 물을 주기도 했다. 3년생 소형종 사과나무는 햇볕이 가장 잘 들고, 집과 가까운 데 심었다. 다른 묘목은 텃밭을 둘러보며 심을 데를 정했다. 땅은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촉촉했다. 아버지는 텃밭에 콩을 심는다고 퇴비를 뿌려 놨다. 농사를 전혀 모르는 내가 봐도 땅은 기름져 보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팡이를 심어도 싹이 나올 것 같았다. 한 삽 펐더니, 젓가락만 한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퇴비 썩은 냄새와 잡초 뿌리 향기와 땅 내음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향긋했다. 좋은 땅을 골라 화분을 채우고 무화과를 심어, 비닐하우스에 두었다. 아직은 쌀쌀해서 고추 모종 사이에서 자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오가며 물을 주고 싹이 자라나는 걸 지켜볼 것이다. 수국은 마당 화단에, 앵두는 장독대 뒤쪽에, 자두나무와 살구나무는 담벼락과 텃밭 한편에 심었다. 삽질 몇 번 했다고, 속옷까지 흥건히 젖었다. 채 한 시간도 일하지 않았는데, 허리까지 욱신거린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농사로 먹고살기는 틀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이나 많이 읽으라고 했다. 지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나무를 다 심고 유튜브를 봤다. 정원수를 어떻게 심어야 하고 관리하는지 알려 준다.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정답 맞혀 보는 데만 열중하는 꼴이다. 점수는 뻔하다. 보고 있는데 한숨이 났다. 나무 간 식재 거리는 2m가 넘어야 하고, 자두와 사과는 병충해가 많아 정원에서 키우기 힘들단다. 당장 몇 그루는 옮겨 심어야 한다. 벌레 없애는 건 아버지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모임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나무를 둘러봤다. 뭘 이렇게 많이 심어놨냐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트럭에서 전지가위를 가져와 사과나무의 가지를 쳤다. 왜 자르는지 이유를 하나하나 알려줬다. 비닐하우스 안에 무화과 화분을 보고서는 그냥 땅에 심지 그랬냐면서도 흡족해했다.


나무를 심은 지 2주가 되어 간다. 나무의 싹은 올라왔고, 꽃은 피었는지 궁금하다. 6월이 되면 수국과 함께 어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필 것이다. 아버지는 무더운 여름이 오면 무화과를 따서 어머니와 함께 맛있게 드시겠지. 많이 열리면 이웃과도 나눌 테고. 아들이 심은 나무라고 자랑하면서 말이다. 삼 년 지나서 살구와 자두까지 열리면 열매뿐만 아니라 부자를 꿈꾸었던 어릴 적 추억도 함께 맛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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