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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08. 2024

어머니의 들깨 머위탕


어버이날, 며칠 전이었다. 시골집에 가고 있는데, 서울 사는 친구 태경이한테 전화가 왔다. 최고 품질의 고기를 사 놨으니, 저녁 자기 시골집에서 먹잔다. 나는 임플란트 수술을 해서 믹서기로 갈아 주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태경이는 제수씨가 되새김질해 준 걸 씹어 먹으란. 역시 나보다는 한 수 위 친구다. 그나저나 뭐 하고 있냐고 했더니, 고사리를 꺾고 있단다. 지금쯤이면, 다 쇠지 않았냐고 물었다. 태경이는 오래전 내가 보내 준 수필인 <어머니의 육개장>을 들먹이며, 진짜 네가 쓴 거 맞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이즘이면 우리 집에서는 고사리와 토란대, 대파, 양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이 펄펄 끓고 있었다. 봄나물도 상을 가득 채웠다. 봄에는 발품만 팔면 지천으로 널린 게 나물이었다. 닭장에서 꺼낸 달걀로 만든 반찬도 빠질 수 없다.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4년 전까지는 그랬다. 며칠 전 전화했을 때 어머니는 음식을 사 오면 좋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오는 손주와 며느리, 아들에게 맛있는 걸 먹이긴 해야겠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나 보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시골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고샅길까지 나와 우리를 반겼다. 어머니도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선 자신보다 훌쩍 커 버린 손주들의 등을 두들기며,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오전부터 치과에 다녀오고, 시장까지 보다 보니, 벌써 두 시 30분이다. 사실, 마취가 풀리면서 이가 아려서 입맛도 없었다. 전자레인지에는 커다란 냄비 두 개가 끓고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육개장 대신 김치찌개와 제철 음식인 들깨 머위탕이다. 아내는 힘든데 뭐하러 하셨냐고는 했지만, 살짝 기대하는 눈치다.
 
아내는 20년 전, 시골집에 첫인사를 왔다. 그때는 육개장과 머위탕이 상에 올랐다. 목포에서 자란 아내는 같이 생겼지만 탕이라고 부르고, 맛은 탕인지 죽인지 조금 헷갈리는 머위탕을 처음 먹어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정말 맛있어요."라는 말을 연신했고, 어머니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한식구가 됐다는 걸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는 머위탕 한 그릇을 내 앞에 놓았다. 이 때문에 부드러운 걸 먹어야 하는데, 잘 됐다면서. 아버지가 농사지은 들깨를 아낌없이 넣은 국물은 걸쭉하면서도 담백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머위는 부드러우면서도 식감이 좋았다. 몇 번 떠먹다가 갓 지은 뜨끈한 밥을 말았다. 이가 없어도 씹는 데 부담이 없다. 속은 편안하고 기분 좋게 배부르다. 시골 음식, 어머니 손맛의 매력이다.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야 뜯을 수 있는 고사리는 몰라도 주방 창문으로 보이는 머대까지 그냥 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들과 며느라가 좋아하는 머위가 며칠 지나면 꽃이 핀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뒤곁 비탈의 머위를 꺾는 것은 아버지 몫이었겠지. 어머니는 남은 탕은 집에 가져가라며 그릇에 담다. 어금니 두 개가 빠진 아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말이다. 반백 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받는 게 더 많다.

다음 날, 아내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아들에게 먹인다며 매운 갈비찜을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머위탕도 꺼냈다. 갈비 몇 대는 내 몫으로 잘게 썰었다. 나는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알싸하다. 차가운 머위탕은 매운 음식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이 음식도 세월이 흐르면 어머니의 육개장처 글과 마음으로만 추억하게 될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아내가 육개장은 몰라도 머위탕 만드는 법은 확실히 배웠다고 하니 위안이 된다. 어머니의 사랑이 빚이라면, 이번 생애 갚기는 틀렸다. 빚이 줄기는커녕 늘어만 는데, 어느 세월에 다 돌려 드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빛인가 보다.

 <어머니의 들깨 머위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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