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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un 20. 2024

아주 편한 여행(고향 여행)

<50살이 되기 전에 한 50가지 일>

'일주일쯤 애를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세요.' 신랑 생일인데, 어떤 선물을 해 주면 좋겠냐는 사촌 형수님의 페이스북 에 누군가가 남긴 댓글이다. 아쉽지만, 내게는 그럴 기회 없었다. 처가는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일주일쯤 친정에 편하게 다녀오라고 하면, 아내는 살포시 웃으며 대꾸한다. "당신이 애들 데리고 한 달쯤 시댁에 다녀와, 아주 편하게" 아무튼, 유부남들은 목줄에 채워진 개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것 같다. 혹시 나만 그런 건가!     


지난 금요일, 시골집에 2박 3일로 다녀오기로 했다. 결혼하고 나서 혼자 이틀 묵는 건 처음이다. 아내는 기숙사에서 나오는 아들을 챙기려 빠졌고, 딸은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춘기여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내는 내 꿍꿍이를 대충 아는 듯했지만, 잘 다녀오라고 했다. 어버이날 다녀온 이후 한 달이 넘게 지났고, 쌀통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분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일곱 시인데도, 하늘은 이제서야 슬슬 노을이 번졌다. 라디오를 <세상의 모든 음악>에 맞췄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다. 어른이 돼 혼자 떠나는 고향으로의 여행 감성을 맞춘 듯한 음악이 한 시간 넘게 흘렀다. 어둠 온 세상을 고요하게 감추고 있었다. 시골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어릴 적 어머니 품처럼 포근다. 마당에 발바리는 몇 번 봤는데도, 앙칼지게 짖는다. 그마저도 정겹다.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렸다. 혼자만 들어서는 게 내심 아쉬운 듯했다. 그래도 아들이 반가운가 보다. 밥은 먹었는지부터 묻다. 시골 밤은 아홉 시만 돼도 깊어진다. 부모님은 곧 잠이 들었다. 나는 바깥 공기를 쐬러 나섰다. 별은 구름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흐릿했다. 아주 가끔 나타나는 반딧불이를 기대하며, 시골길을 걸었다. 반갑지 않은 깔따구만 눈, 코, 입에 사정없이 달려든다.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사방의 논에서 개구리가 목청을 높여 운다. 이 청량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면, 여행 첫날은 맹탕으로 보낼 뻔했다.     


다섯 시쯤 눈이 떠졌다. 나를 가장 기다린 건 창고 앞에서 짧은 줄에 묶여 지내는 1년생 진돗개 황구였을 것이다. 나를 보자 오두방정을 떤다. 자신의 자유를 옭아매는 목줄에서 잠시 해방걸 알고 있다. 내가 아니면 개들이 그들의 반경 2m를 벗어 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여러 번 산책을 시키려고 한다. 이번에는 발바리도 처음으로 따라나섰다. 황구는 서열을 정리하려는 듯 발바리를 사정없이 물었다. 물어 죽이는 거 아닌가 싶지만, 겁만 주는 거다. 황구를 떼어 내고, 머리를 쓰다듬자, 배를 까고 드러눕는다. 자연스럽게 내가 대장이 된다. 발바리도 인정하는 눈치다. 우리 셋은 흙길을 걸었다. 누구도 우리의 발걸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냇가의 진녹색 갈대밭 사이로 안개가 서려 있다. 여러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선선한 공기에 실려 더 선명하게 들린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한 농촌의 삶이 좋은 걸 보면, 나는 목가주의자가 되고 싶은 게 분명하다.      

<산책 나선 셋, 고향 냇가>


집에 다다랐는데, 커다란 드론이 논 위를 날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시골 옆집 동생이 농약을 뿌리는 거다. 농사에도 첨단 기술을 쓰는 게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자연의 일부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망가지는 것 같아서다. 반딧불이와 박쥐는 자취를 감췄고, 미꾸라지와 제비는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 농약에 내성이 생긴, 인간을 비롯한 강한 종만 살아남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모두 공존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까! 욕심을  줄이면 될 듯한데, 그게 말처럼 운 게 아니니 답답할 노릇이다.  

     

오랜만에 얻은 기회를 평범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친구 따라 내장산 서래봉 바로 밑까지 올랐다. 바위를 오르는 계단무서워 포기했다. 용감했던 친구는 정상에 올라 “야호”까지 외쳤다. 번지 점프대에 올랐다가 나만 혼자 그냥 내려온 기분이랄까! 내겐 모욕적인 순간이었고, 꼭 다시 오르리라 몇 번을 다짐했다. 그러다 50에 가까워졌다. 비슷한 높이의 월출산은 열 번 넘게 올랐으면서 말이다. 산행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차 트렁크에 있던 등산화를 신었다. 집에서 챙겼다고 생각했던 물은,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다. 산에 오면서 마셨던 커피의 얼음만 남았다. 불안하긴 했지만, 돈을 주고 물을 사려니, 두고 온 게 떠올라 생돈을 날리는 것 같았다. 꼭 쓸데없는 데서 고집을 부리고, 자린고비가 된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였다. 정읍의 명산답게 숲이 울창했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아침마다 운동해서인지, 서래봉 지원센터에서 불출봉(622m)까지 힘들지 않게 올랐다. 여기서 내려가면, 40년 만에 온 것 치고는 뭔가 아쉬운 것 같았다. 내장산 여덟 개 봉우리를 힘닿는 데까지 걸어 보려고 맘먹었다. 정상에서 보니 내장산도 아주 작아 보였다. 중학교 때 농사를 도울 때는 축구장만 해 보였던 아버지 땅이 지금은 텃밭처럼 보이는 기분이랄까. 산을 우습게 알고 연지봉(670m)까지 걸었다. 어느 순간 숨이 턱턱 막혔다. 현기증까지 났다. 얼음은 이미 녹아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기도 애매해졌다. 까치봉(717m)까지 2km를 가서 십 리를 걸어 내장사로 내려오는 방법이 최선이다. 속옷까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다리는 무뎌졌다. 의자에 잠시 누워 아름드리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봤다. 산수국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은 다행히 힘들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이 더 컸다. 벌써, 두 시가 넘었다. 편의점에 들러 하나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이온 음료를 골랐다. 벌컥벌컥 마셔서 하나를 금세 비웠다. 나머지 하나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른이 돼서 어릴 적 꿈을 실행해 보면 어떤 것은 아주 수월하게 이뤄진다. 문제는 실행조차 안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내장산에서>

저녁에는 몸이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뒤척거리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커피의 카페인 때문이 아니다. 원인은 분명하다. 잠자리가 바뀐 탓이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던 시골집을 몸이 이제는 낯설 게 느낀다. 아버지는 자면서도 텔레비전을 틀어 놓는다. 그래야 더 깊게 잘 수 있단다. 요새 귀가 더 잘 안 들리는지, 안방 소리가 거실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새벽에는 두세 시간 간격으로 마당을 오가며 담배도 피웠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면 안방 문만 열고 담배를 태웠다. 간접흡연이 안 좋다는 게 알려지기 전이고, 버스에서도 끽연하던 시절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섞인 담배 연기의 구수한 냄새는 아버지의 체취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게 젊은 시절이 있었나 싶다. 내 기억에는 아버지는 언제나 검게 탄 얼굴에 추레한 옷을 입은 농부였던 것 같은데.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오늘의 이 기억마저 소중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 부모님댁에 자주 들러야 하는 거겠지.

    

마지막 날 아침에는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감자를 캐고, 오이와 호박을 땄다. 감밭에 농약을 뿌렸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남매가 가져갈 농작물을 아버지가 조건 없이 키워주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서 상추와 고추를 땄다. 차에 마늘 한 포대와 쌀 한 가마니도 실었다. 진돗개는 내가 떠나는 걸 직감했는지, 풀이 죽어 바닥에 누워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마당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향 여행은 언제나 기대를 품고 왔다가, 아쉬움을 안고 간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아내 덕에 3일 시골집에 잘 다녀왔다. 아주 편하게.

<시골집과 아버지의 감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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