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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Sep 22. 2018

아버지

| mother's Answer |     존경하는 인물은?



1. 취미? 노래

2.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는? 집안 청소, 빨래 끝내고 드라마 볼 때

3. 좋아하는 명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4. 습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 것

5. 어린 시절의 꿈? 음악 선생님

6. 나의 단점? 참을 땐 참지만 욱하는 성질

7. 많이 보는 TV 프로그램? 드라마

8. 나의 매력 포인트?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9. 인생 최대의 실수?  할려고자하면 할 수 있었던 공부를 시작 못한 것

10. 좋아하는 음악? 카페 음악

11. 스트레스 해소법? 노래 흥얼거리기

12. 10년 후의 내 모습? 편안히 잘 살 거 같다

13. 자랑하고 싶은 맛집은?

14. 좋아하는 계절? 가을(겨울이 좋았는데 나이 들면서 추위가 싫어서)

15. 여행 가고 싶은 곳? 울릉도, 독도

16. 존경하는 인물? 아버지

17. 노래방 18번? 눈물의 연평도, 흑산도 아가씨

18. 보물 1호? 딸 둘

19. 배워보고 싶은 것? 기타

20. 어릴 때 가장 행복한 기억? 아버지가 잡아오신 꽃게랑 소라 삶아 먹을 때



오늘 주제는 ‘아버지’ 예요. 우리 아빠 말고 하늘에 계신 엄마의 아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면서 눈가가 젖는다. 괜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주 찰나의 순간, ‘하지 말까?’ 하는 말을 할 뻔했다.

이윽고 편안해진 엄마의 얼굴을 보고서는 잠깐의 시간 동안 엄마가 할아버지를 떠 올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꽃게나 소라를 먹을 때 아버지가 가장 생각난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저녁 꽃게를 먹었는데, 엄마는 게 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한 번 더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져오신 게, 소라의 싱싱함이나 맛은 요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유년시절 무엇이든 맛이 있던 기억일까 아니면 잊고 싶지 않아 그 맛을 싱싱하게 기억하는 것일까.


2-3년 만에 한 번씩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고, 그러고 나면 꼭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다. 최근에는 약 1년 전쯤 꿈에 나왔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옛날 집에서 마당을 쓸고 계셨다고 한다. 늘 든든하고 바람막이처럼 느껴졌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다 큰 딸은, 꿈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


살아계셨을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가장 죄송스럽고 한스럽다고 한다. 처녀 때는 꽤나 잘하는 딸이었는데 결혼 후 내 가정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께 잘하지 못했으니까.

영양제 하나 사드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오히려 처녀 때 한약이며 옷이며 더 해드렸었는데..”

엄마가 고개를 떨궈 다음 질문을 하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영양제 한 알 챙겨 드리면서 오래 사시라고 말하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렸다고 했다.


Photo by Seth Hays on Unsplash


할아버지는 엄마가 40대 후반쯤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중학생 때라 ‘죽음’이 가져오는 감정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약간의 슬픔과 안쓰러움 정도. 할아버지가 무릎에 앉혀 키운 손주가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까불고 있을 때 ‘저 철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음을 알지 못했다. 괜한 시기어린 마음에 가려 아버지를 여읜 엄마의 속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만약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학교를 보내달라고 할 거란다. 난 엄마가 이렇게 대답할 줄 알고 있었다. ‘학교’는 엄마의 마음 한 켠에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며 딸 들을 교육시키지 않았고, 한 달을 죽어라 공부하면 학교를 보내줄까 하는 마음에 안 먹고 안 자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열정에 비해 할아버지의 결의가 더 굳었는지 결국 엄마는 원하는 학교를 얻지 못했지만 막냇동생의 용돈을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장구 솜씨는 동네에서 제일이었다고 한다. 잔치라도 열릴 때면 빠지지 않고 모셔가는 고수였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아주 기가 막혔다”라고 하니 마치 내 귀에 장구 가락이 들리는 것 같다.

엄마와 이모들의 가락을 뽑는 솜씨는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란다. 옛날 시골집 마당에서 할아버지가 장구를 치고 이모들이 어깨를 들썩이는 상상을 했다. 마당에 매달려 있던 북어도 흔들거리는 것 같아 괜히 눈을 한번 감아보았다.


엄마의 동창들은 아직도 할아버지 얘기를 한다. 엄마가 처녀 때 타지에서 강화도 본가에 왔는데, 옆 마을 남자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는 밖에 찾아와 “애자야~” 하고 불렀단다.

“밖에 누구냐!”

불호령 같은 소리에 놀라 친구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도망갔다. 나고 자란 마을의 지리를 할아버지만큼 알리가 있으랴. 결국 한 친구가 잡혔고, 사내자식이 왜 도망을 가느냐며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엄마의 남자 친구들은 '노인네 진짜 빨랐다'며 아직도 도망가던 그때를 생각하니 기분이 오싹하다며 웃는다.


“애자야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할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엄마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 한 마디를 말한 순간, 엄마는 보상심리가 들었다고 했다. 가실 때라도 표현해 주시니 작게나마 있던 원망이 사라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지금 아버지를 만난다면 너무 사랑하고, 이제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목이 멘 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
- 독일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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