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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화 Mar 19. 2023

그림만 그리면 될 줄 알았지?
(feat. 디자인)

[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09

 2022년 1월.

 그러니까 그림책 작업이 약 60% 정도 완료된 시점, 그림작가님의 컨디션을 배려하기 위해 한 달 정도 쉬었던 작업을 슬슬 재개해야 할 시점, 그리고 그림책 출판 관련 지원사업에 응모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출판비를 펀딩으로 충당해야겠다고 결정한 시점, 하지만 펀딩 페이지에 필요한 목업 이미지와 표지 및 내지디자인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갑갑해하던 시점이었다. 나는 디자이너님이 필요했고, 센터에는 약 2-3명 정도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분들이 계셨지만, 그 분들은 한창 바쁘거나 연이 닿지 않았다. 왜 이렇게 할 일이 많니... 나는 머리는 복잡하지만 넋은 놓은 채로 크몽, 숨고 등의 페이지를 들락날락거렸다. 느낌이 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즈음 센터에서 만나 몇 번 대화를 나눴지만, 특별한 친분을 쌓기도 전에 센터를 나간 언니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언어를 배웠고, 별별 직업을 거쳐본, 세간의 말을 빌려 부르주아 같은 사람이었다. 내 주변에서 이렇게 아비투스가 높은 사람을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이래나 저래나 서로 향유하는 문화적 자본의 수준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언니와 내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친해지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연락해 밥을 먹으며 대화하는 것도 고마운 관계, 그렇게 언니와의 관계를 규정 지은 상태였다. 그런데 바로 이 가끔의 연락과 대화 속에서 나는 우연히 언니가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력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이력이 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전공도 디자인 쪽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오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달밤님과의 협업이 본격화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섣부른 기대를 가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언니에게 그간의 그림과 디자인 작업 포트폴리오를 볼 수 있는지, 혹시 관련된 외주 작업을 맡긴다면 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언니가 다양한 경험과 업력을 가진 데에는 폭넓은 관심사와 개방성이 큰 몫을 했던지라, 언니의 반응 역시 매우 긍정적이었다. 간단한 저녁식사에서 회의로 변한 약속을 위해 나는 부푼 마음으로 센터가 끝나자마자 언니를 찾아갔다.




 이미 펀딩을 오픈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날의 회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모든 과정이 완료된 후 회고처럼 글을 적다 보면 이는 아쉬움은, 그 당시의 불확실함과 불안함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이미 일이 성사된 이후의 안정감을 보지만, 당시의 핵심 기조는 안정감 이전의 불확실함, 그리고 불확실함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의 놀라움이기 때문이다.) 언니의 그림과 디자인은 기이할 정도로 내 취향을 저격했다. 이상한 표정의 태양과 같은 빈티지한 삽화, 앤틱한 디자인... 주변에서 이러한 취향을 공유한 사람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또 취향이 비슷하더라도 그걸 그림으로 그려낼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책을 디자인해줄 분이 필요한 이 시점에, 내가 그림책에 녹여내고 싶었던 분위기를 좋아하고 표현할 재능이 있는 분이 나타난 이 사건이 마치 우주의 거친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 때부터 나는 언니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생각보다도 깊은 연이 있을지도 몰라. 앞으로 오래도록 함께 작업할지도 몰라.




 여러 분야에서 일을 해본 언니인만큼 외주 계약서 작성, 회의 일정 수립 등 모든 과정이 능숙했다. 나는 요청하고 싶은 사항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했고, 언니는 내가 전달한 내용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작업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요청한 '항목'들은 구체적이었지만 '컨셉' 자체는 다소 모호했다. 가령 내가 '앤틱하면서도 모던한 스타일' 등의 추상적인 부탁을 하면, 다른 디자이너분들이야 속으로 욕을 하겠지만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하면 얘도 좋아하겠지' 하는 감에 기대어 작업하였고 결과물은 언제나 내 무릎을 탁 치게 하였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 가령 펀딩 페이지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톤을 특정한 컨셉에 맞춰 일관성을 준다던가 하는 등의 의견 제안은, 기획 자체는 거의 혼자 해왔던 내게 정말 고마운 것이었다. 




 언니는 언제나 요청사항 이상의 퀄리티를 내주었고, 작업 일정도 정확히 준수하는 스타일이었다. 3달 동안 우리의 협업은 수월하고 담백하며 경쾌했다. 2월 초, 나는, 아니, 그림작가와 디자이너님을 포함해 우리는 드디어 텀블벅 펀딩을 오픈했다. 그림작업, 내지디자인, 편집, 기타 작업들이 산처럼 쌓여있었지만 펀딩 오픈이라는 큰 산을 넘었으므로, 그리고 펀딩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퍽 괜찮은 결과를 이룬지라, 나는 그림책을 창작한 이래 처음으로 압박감보다 기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https://tumblbug.com/thesunchasers?ref=GNB%2F%EC%B6%9C%ED%8C%90






디자이너님의 크몽 링크 : https://kmong.com/gig/429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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