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정화 Jan 10. 2023

오매!
내 딸이 자퇴하고 출가를 한다고?

OMG[오매! 갓이시여!] 시리즈 #02


엄마, 나 자퇴할래. 그리고 출가할거야.



 내 자식들. 비록 평범하더라도 남 못지않게 살길 바라던 우리 엄마에게 나의 고백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자퇴'와 '출가'. 하나만으로도 뒷목을 잡을 단어들이 한 문장에 두 개나 담겨있었다. 아,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일지도 모른다. '엄마', 까지. 이 통보를 뱉는 이가 당신의 '딸'이라서 그저 웃어넘길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이야말로 가장 뒷골이 땡기는 진실이다. 그 당시 나는 더이상 육체적으로 동생들을 제압할 수 없었던 나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자퇴와 출가를 운운하는 이유야, 사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안 봐도 뻔했다.



 "정화야, 너 현실도피하려는 거야."



 벌써 10년이 넘은 지금, 더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 세상 솔직히 고백하건대, 엄마의 통찰은 매우 정확했다. 수험 준비를 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만큼 치열하고 각박한 일상은 드물다. 물론 지금이야 그보다도 쉽지 않은 여러 삶의 형태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10대의 어린 나이에는 치열한 다른 삶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저 막연한 남들의 고통보다 당장 2년이 넘게 지속될 것이 분명한 나의 고통, 그리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될지도 모를 고통들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내가 성적이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초반 거의 주목하지 못할 성적으로 입학했던 나는, '교과서에 충실했어요' 식의 본질에 집중하는 자세로 인해 꽤 좋은 성적으로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적과 태도를 중시하는 선생님들에게 이쁨도 꽤 받았다. 그런데도 자퇴를 결심한 데에는 수험 스트레스보다도 핵심적인 이유가 있었다. 벌써 10년이 넘도록 알고 지낸, 지금은 둘도 없는 단짝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이 갈등은 우리 둘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이 관계 속에서 나 홀로 품어온 갈등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동생들과 싸우며 '경쟁'과 '적자생존'을 삶의 원리라고 굳게 믿어온 태도 때문일까, 고등학교에 올라오기까지, 나는 그 원리를 굳이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사회화는 되어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만큼은 문득문득 그 추잡한 속내가 치밀어올랐다.



 내 단짝을 유독 좋아하던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그 수학선생님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 단짝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야, 그 쌤은 널 왜 그렇게 예뻐한대?'라고 한 번씩 운을 뗄 정도로 그 선생님은 수업시간에도 단짝만 꼭 짚어서 질문을 했다. (꼭 짚어서 질문하는 게 예뻐하는 건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선생님들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만 대답해주겠다. 예뻐하는 학생을 대학원으로 끌고 가는 교수님들을 보면 된다. 그분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애정표현이다.)



 '어쩌면,' 나는 생각했다. '저 선생님은 나보다 내 단짝이 훨씬 착하다는 걸 알테지.'



 사실 그 선생님이 아니어도 나보다 내 단짝을 더 어여뻐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나와 내 단짝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그냥 재미있고 공부 잘하는 친구였고, 단짝은 속이 깊고 착한 친구였다. 후자 쪽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즈음 처음 알았다. 단짝보다는 내가 성적이 더 좋았다. 성적이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된 기준이 되는 고등학교에서 아마 단짝도 나만큼, 나름의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마음고생들 중에서도 나에 대한 질투나 열등감으로 인한 마음고생만큼은 없었을 수도 있다. 단짝은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내게 치열한 경쟁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간혹 그런 마음을 품는 것 같으면 미안함에 더욱 친절하게 대했고, 단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며 몇몇 친구들은 왜 그 아이가 나와 친한지 의아해했다.



 지금이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데에는 무수한 요인이 작용한다는 걸 알지만, 당시의 나는 무수한 요인들을 '성적'이나 '성격' 정도로 지극히 단순화하였다. 수학선생님이 나보다 내 단짝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친구의 선한 성격으로 단정지었다. 경쟁의 게임에 또하나의 법칙이 추가되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성적뿐만 아니라 성품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나는 내 단짝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당연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투쟁의 법칙에 따라 살아왔던, 초식동물을 더 많이 잡아먹을수록 덩치가 커진다고 믿었던 내게 정반대의 논리처럼 보이는 친절함의 법칙을 배우는 건 육식동물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고된 일이었다. 또 모지. 내게 곰과 호랑이처럼 인간이 되겠다는 절박한 바람이 있었다면, 마늘만 먹고도 잘 살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아직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동생들과의 싸움이 그친 건 더이상 내가 동생들을 이길 수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뿐,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이유도 없었다. 만약 내가 육체적으로 그들을 여전히 능가하고 있었다면, 폭력은 더 늦게 멈췄을 것이다. 그런 내게 '단짝의 선함'은, 나의 폭력성을 반전처럼 부각시켜 보여주는 괴로운 품성이었다. 밝음 옆에서 어둠이 더 어둡듯이, 나도 단짝 옆에서는 좀 괴팍한 애에서 악한 애로 전락하였다. 여하튼 내가 평생을 살아온 논리가 지속적으로 부정당함과 동시에, 가장 회피하고 싶던 나의 약점이 단짝으로 인해 계속 드러나는 상황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단짝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왜 나와 자신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슬퍼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심정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 하나가 떠오른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 나오는 아미르와 하산. 하산과의 관계에서 아미르가 느끼는 애정과 부끄러움, 시기심 등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눈물이 나온다. 아미르에 대한 하산의 순수한 애정에 감동해서 울고, 아미르의 어찌할 도리 없는 발버둥과 죄책감, 열등감에 이입된 나머지 처절해져서 운다. 아미르와 하산이 꼭 나와 내 단짝 같았다. 다만 고등학생의 나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삼키는 편을 택했다. 마땅히 흘러야 할 눈물을 삼킬수록 가슴은 단단하게 얼었다. 나는 싸늘해진 시선으로 단짝을 무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성적 논리에 강한 아이들조차도 명백히 보이는 악역과 선역에는 확실한 태도를 취했다. 반아이들은 몇몇을 빼고 대개 나보다는 단짝과 친구로 남길 택했다. 처음의 의도와 달리, 단짝이 아니라 내가 고립되어갔다. 부끄러움에 치욕스러움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착하게 살 걸. 후회하면서도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별별 핑계를 다 대면서 나는 자퇴와 출가를 통보했다. 사유가 길었지만, 그래, 나는 나의 추접스러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내 미련한 짓의 결과로서 고립된 학교생활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이런 일련의 욕망과 어린 논리가 결합되어 '자퇴 이후 출가'라는 통보로 이어졌던 것이다.



 현실도피하려는 딸을 둔 엄마는 현실부정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엄마는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소개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사를 지내는 종교단체에 찾아갔다. 하루는 엄마가 그곳에 나를 끌고 갔다. 한복으로 차려입고, 엄마와 나는 백 번이 넘게 절을 했다. 절을 하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내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다른 누군가에게 절을 하는 행위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딸이 자퇴하고 출가하는 걸 말리겠다고 다른 종교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행위에 어떤 논리가 있지? 엄마는 조상신이 부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 하나를 찾아야만 했는데, 절을 찾아가면 딸의 결심에 불을 지펴줌과 동시에 지푸라기도 타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등등. 되려 출가를 해야겠다는 마음만 확고해졌다. 결국 사람들은 절박하고 힘들면 신이나 종교를 찾는다. 나는 그 탐구를 조금 더 일찍 시작하려는 것 뿐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직장처럼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지지부진한 루트를 거치며 굳이 시간낭비를 하지 않고 말이다.



당시 엄마의 심정, 그리고 어쩌면 나의 심정



 어느날, 엄마는 이름도 모를 조상신에게 드리는 절이 효과가 없고, 딸의 마음은 돌려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눈물이 마른 눈으로, 조금 잠긴 목소리로 새벽 일찍 나를 깨워 광주에서 멀지 않은 큰 절에 나를 데리고 갔다. 조수석에 타 아름드리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 선택에 책임지는 것을 마지막 방패처럼 막아주던 엄마가 사라지자, 나는 정말 내뱉은 말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말 나는 머리를 밀고 절에 들어가게 되는 걸까? 머리를 밀기에 내 두상은 그리 예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 선택이 실감나면서 후회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출가를 결심했더라?



 단짝이 떠올랐다. 당시 내 자퇴 의사는 이미 학교에 전달된 이후였다. 단짝이 이 소식을 들었을 즈음 우리 사이는 이미 소원해질대로 소원해져 있었다. 단짝을 좋아하던 수학선생님의 수업 도중 갑자기 단짝은 울기 시작했다. 놀란 선생님은 단짝을 데리고 나갔다가 잠시후 반으로 들어와선 나를 불러냈다. 눈물을 잔뜩 흘려 눈이 빨개진 단짝이 말했다. 내가 자퇴를 한다고 하니, 그동안 자기가 못해준 것들이 생각나 너무 미안하단다. 단짝이 내게 왜 사과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사과를 할 수가 있나? 나는 여전히 놀랐다. 그날 저녁 우리는 처음으로 야자를 빼고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사이가 데면해진 데에는 내 책임만 있었는데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단짝을 보며 나는 내가 왜 단짝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불편해질 정도로 착한 사람이 주는 우정을 받는 사람도 나였다.



 정말 내가 왜 출가를 결심했더라? 큰 절에 도착해서 엄마는 스님을 만나러 갔다. 나는 심란해진 속을 달래려 해우소에서 볼 일을 봤다. 쪼그려 앉은 내게 커다란 벌레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산 속 절에는 벌레가 많았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나는 엄마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정화야, 절도 사람 사는 곳이라 똑같아. 거기서도 싫은 사람 봐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해."

 절에도 벌레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있었다. 더이상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날 나는 절에서 자퇴를 번복했다. 엄마는 내 변덕에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들은 단짝은 기뻐했다. 그 뒤로 우리가 다시 이전처럼 가까워지는 데에는 1년 간의 공백이 생겼지만, 우리는 서로를 마주칠 때마다 멋쩍게 웃곤 했다.



 요란했던 자퇴 소동은 우습게 마무리 되었다. 현실을 도피하려는 발버둥이 얼마나 빈약하고 무책임한지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소동 사이에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엄마는 생각보다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상한 짓을 한대도 나를 사랑한다. 둘째, 내 단짝도 그렇다. 그 덕에 우리의 관계는 10년이 넘도록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이후 내 삶이 어두울 때에도 단짝의 선함이 등불이 되었다. 셋째, 어쩌면 나는 출가를 했어도 무난히 살았을 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마주한 또다른 현실에 충격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나름대로 적응하였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생에서 만날 인연들, 내가 하는 일, 내 삶의 장면들은 전부 달라졌을 것이다. 넷째, 그 날 나의 자퇴와 출가를 막은 벌레는 엄마와 단짝의 눈물 때문이든, 조상신의 가호 때문이든, 부처님의 자비 때문이든, 하나의 분명한 계시였다. 그리고 마지막, 나의 추접스러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바람만큼은 매 순간 진실이었다. 나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매순간 나를 궁금해하고 부끄러워한다. 비록 머리를 밀진 않았지만, 수행자만큼이나 진지하게 자신과 삶을 알아가겠다는 결심에는 언제나 책임을 다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헐! 잘못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