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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Nov 07. 2023

무서운 상사가 바로 나였어!

2학기가 되자 칼리지 과제 대부분이 그룹 과제로 바뀌었다. 주로 둘 씩 짝을 지어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교수가 이렇게 둘 씩 그룹을 지어주는 데는  웹 디자인과 웹 프로그램 개발을 모두 배우고 있으니 학생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프로젝트를 하라는 이유였다.


나의 경우 순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선택한 전공이라 디자인이든 프로그램이든 한 분야만 정해놓지 않고 골고루 열심히 배우는 입장이었다. 졸업을 한 후 직업을 이쪽으로 바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뭘 배우게 되면 열과 성을 다하는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곳에 와서 알았다. 한국인은 디폴트값 자체가 성실, 근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디폴트에는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국인에게는 기본적인 것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 몰랐으니까. 


이제 갓 스물에서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친구들은 모두 이 전공으로 직업을 갖고 영주권을 따기 위해 이 먼 캐나다까지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솔직히 나보다 더 목숨 걸고 배우고 있을 거라 지레 짐작했다. 지레짐작... 이 얼마나 위험한 징후를 포함한 단어이던가.


우리 반에는 스물여덟 살의 착한 중국인 아가씨, 아니 아가씨처럼 보이는 유부녀 학생이 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참한 이 친구는 다른 학생보다 디자인 실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꽤 성실했다. 반에 몇 안 되는 아시아인이기도 해서 우리는 곧장 수업 시간에 같이 앉고 많이 친해졌다. 


점수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말 프로젝트를 이 중국인 친구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성실성 때문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업에 빠지지 않았고, 숙제도 꼬박꼬박 제출했다. 디자인으로 진로를 정한 학생은 프로그램 수업 시간에는 잘 나오지 않았고, 반대로 프로그램으로 정한 학생은 디자인 수업에 잘 빠졌다. 그리고 일을 하느라 수업을 빠지는 학생도 많았다. 


나는 기말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디자인을 모두 끝내놓은 상태였다. 이 친구는 그저 내가 만든 디자인에서 코딩만 해서 디자인을 구현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수업을 조금 버거워하던 중국인 친구는 너무나 좋아했다. 홈페이지에 담길 사진과 영상을 만들려면 C4D,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미어 프로까지 디자인 프로그램을 만져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솔직히 코딩까지 혼자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기말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과제를 일주일 후에 내야 하는 만큼 나는 제출 기한 3일 전에 내게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야 제출 전에 문제점이 있으면 해결할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홈페이지의 페이지를 나누어 코딩하면서 발생했다. 이 친구가 만들어서 보낸 웹 페이지 일부가 깨져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화면이 깨졌다, 코딩에 에러가 있으니 체크해서 다시 만들어 보내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깨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 친구가 짠 코드를 내가 원인을 찾아 그 부분을 다시 코딩했다. 


코딩을 모두 짜면 코딩이 올바르게 작성되었는지 검증(validation)을 해야 하는데 과제 제출 전에 이 친구 코딩을 검증 시스템에 돌렸더니 태그 에러가 수 십 개가 나왔다. 쉬운 것은 내가 수정했지만 몇 시간 동안 수정하다 보니 소위 현타가 세게 왔다. 나는 그 친구에게 파일을 보내 검증을 했느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하지 않았다고 자백했다. 코딩의 기본이고, 점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개인 과제도 아닌 그룹과제를 무책임하게 해서 보낸 데에 화가 났지만 아직 고칠 시간이 있으니 고쳐서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결국 제대로 다 수정하지 못해서 보냈고, 내가 다시 수정해야 했다. 코딩도 1학기에 배운 기초적인 걸음마 코딩을 하고 2학기에 배운 중급 문법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 그것도 모두 고쳐야 했다. 처음부터 내가 코딩을 했더라면 시간이 덜 걸렸을 텐데 이 친구 코딩을 처음부터 다시 짜느라 이틀을 꼬박 새운 나는 결국 몸살이 났다. 


그런데 이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 내가 너무 꼼꼼하다며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자신은 학교를 졸업만 하면 그만이다, 과제는 그냥 내는데 의의를 두고 학점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화가 조금 났지만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면 얼마나 매운맛, 쓴맛을 보는지 모르는구나... 싶어 나는 그 친구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네가 정말 코딩 쪽으로 나가고 싶다면 지금 하는 과제는 기초 중의 기초라서 제대로 해 두어야 한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데 수업 시간에 배운 기본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직업을 구할 수 있겠느냐라고, 너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 무책임한 태도도 문제가 있고 실력도 부족하다고 팩트폭행을 했다. 내가 딱 질색하는 스타일이라 참지 못한 것 같다. 무능하고 불평은 많은데 착하기만 하는 스타일. 


 그러자 친구는 내가 너무 무섭다고 답했다.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나에게는 기본이 이 친구에게는 퍽 버거웠나 보다. 나는 교수에게 배운 데로 과제를 했고, 교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과제를 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둘 다 성인이기에 그 친구를 오구오구 달래며 과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내가 상사가 되면 부하 직원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상사가 되겠다...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에서 내가 그다지 높은 자리에 있진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 미래가 환하게 그려졌다. 나는 내가 정한 기준점이 분명한 사람이고, 그 기준점에 못 미치는 직원을 보면 꽤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자명하다. 


점수가 뭐 그리 대수라고, 실력이 부족해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왜 그렇게 엄하게 굴었는지 조금 후회가 된다. 그 친구가 맡은 부분은 그냥 그대로 제출하면 그만인데. 점수야 그만큼 까먹으면 그만인데. 학교에서 그룹 프로젝트를 부여하는 이유는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수행하라는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인적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갈등을 해결하는가를 배우도록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같은 팀원을 채찍질해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소통을 통해 부족한 팀원을 이끌어주고 조금 모자란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인가. 


과제를 조금이라도 완벽에 가깝게 해서 내려는 나의 강박을 이곳에서 많이 깨닫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국 사회에서 빡빡하게 배운 일머리와 근성이 나를 유능한 인재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실수와 부족함에 대한 용납과 관용은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내가 그토록 치를 떨며 싫어하던 상사들의 모습을 어느새 나도 닮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과연 내가 상사가 되면 이런 깨달음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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