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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Mar 18. 2019

여자들만 설거지하는 집

가부장적 가정에서 딸로 태어난 죄

몇 해에 한 번씩은 스무 명이 넘는 친척들이 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가족. 연말과 연초, 어버이날, 누군가의 생일 등 중요한 날은 꼭 다 같이 보내는 가족.

우리 집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화목한 집'인 동시에 '여자들만 설거지를 하는 집'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부장적인 경북 문경의 어느 집에서 딸로 태어났다는 것. 그건 이미 내가 생겨나기도 전에 정해진 '빼박' 운명이었다.

명절 때면 당연히 엄마들이 음식을 하고 뒷정리를 했다. 딸들은 앉아있기 눈치 보여 주방을 서성거리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도왔고, 마치 그런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들은 부엌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밥을 먹을 때엔 남자들은 제사상이 차려져 있는 방 안에서, 여자들은 거실에서 먹었다. '겸상'을 안 한다는 표현까지는 좀 그렇지만, 정해진 것처럼 오랫동안 그래 왔다. 그리고 방 안에서 남자들이 밥을 다 먹고 나오면, 우리는 허겁지겁 남은 밥을 먹고서는 그 상을 치웠다.

나는 줄곧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머리가 커지면서 그것이 점점 이상하게 느껴지며 명절만 되면 큰아빠들과 아빠가 미워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너무 억울해서 참을 수 없어질 때가 많았다. 지난 명절에도 "거,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치웁시다 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씩씩대면서도 부지런히 주방으로 그릇을 날랐다.

평생을 그렇게 가부장적인 집의 막내며느리로 살아온 엄마는 가끔 내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면 그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우리 두 딸이 설거지를 못하도록 싱크대 가까이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되지만, 딸들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나는 그래서, 늘 아들보다 대단한 딸이 되고 싶었다. 아들을 못 낳아서 미움받거나 동정받았던 엄마의 지난 세월을 꼭 보상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 가진 부모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엄마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바쁜 와중에도 집안 행사에 빠지지 않기 위해 틈틈이 고향으로 갔고, 나름대로 세심하고 아기자기하게 부모님을 챙겼다. 모두에게 자랑할 수 있도록,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 딸들은 집안의 어느 사촌오빠들보다도 부모에게 잘하는, '독기 어린 효녀들'로 자라났다.

그런데 작년 구정. 사건이 터졌다. 둘째 큰아빠와 장남인 사촌오빠가 제법 술을 마셨고 두 사람 다 취기가 올랐는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중에 "딸들은 어차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어차피 시집 가면 그만이지"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촌언니의 아들인 조카를 직접적으로 흉보는 말까지 나오게 된 거다. 서러움이 폭발한 사촌언니는 집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내가 집으로 찾아갔을 때 혼자 울며 애꿎은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사촌언니는 늘 집안에 헌신하는 맏이였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돌보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일을 시작해서 집안의 모든 생필품을 자기 돈으로 구비했다. 시집을 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빠와 사촌오빠의 말대로라면 '시집 가면 그만인' 남이나 다름없었지만 친정을 향한 헌신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구정은, 무심한 아들들을 대신해 우리 세 딸이 모든 계획을 짜서 어른들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온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다. 나까지 덩달아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리고 사촌언니는 한동안 가족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일찌감치 집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온 나는 이러한 상황들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학을 가고 서울 친구들을 사귀었을 때, 어느 친구들의 집에서는 종종 아빠가 밥을 지어주고 설거지를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엔 정말이지 큰 충격을 받았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그건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허구인 줄로만 알았다.



회사에서 다 같이 워크숍을 가면 모두에게 먹일 닭백숙을 직접 만드는 남자 대표님도 있었고, 연애를 하면서는 다정한 남자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들을 부려먹고, 또 대접받는 것 자체를 묘하게 즐기기도 했던 내가 있었다.

같은 문경에서 자라온 친구의 사촌동생은, 아직까지 "여자란 자고로..."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큰아빠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자 친구와 호텔에서 찍은 사진을 프로필에 보란 듯이 거는 바람에 집안이 난리가 난 적이 있단다. 그것은 용기였고 반란이었다.

내 평생 그런 트러블메이커가 될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래도 딸로 태어난 게 죄는 아니다.

그리고 손이 있으면 설거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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