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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Mar 14. 2019

내 아빠의 무뚝뚝한 사랑법

2007년 어느 밤의 드라이브

"아니 그래서 그 새끼가 해달라는 대로 간판을 만들어 줬는데 다시 해달라잖아... 씨발"

"그래서 그 집 아들내미가 장가를 간대잖아... 씨발"

"아 오늘 밥이 맛있네... 씨발"

그것은 내 아빠의 오랜 말버릇이었다. 아빠는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항상 씨발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고, 나는 그럴 때면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거나 귀를 틀어막곤 했다. 그리고 나는 웬만해서는 절대 욕을 하지 않는다.

어릴 때의 보통날, 아빠는 늘 찬바람을 몰고 집으로 들어왔다. 별로 말이 많은 타입도 아니었고, 다정한 가장의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씩 거나하게 취한 밤이면, 자고 있는 나에게 와서 까끌한 수염을 비벼대는 아빠였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아빠의 기분으로 좌우됐다. 우리는 늘 아빠의 눈치를 봤고, 그 시대의 여느 경상도 가정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생각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빠와 단 한 번도 영화관을 가본 적도, 마트를 가본 적도 없었다. 장을 보는 건 엄마와 나였고, 아빠는 가끔 인내심이 있는 날이면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서서 재촉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이 내 아빠였다. 그리고 그를 닮아 부모에게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춘기의 여자아이, 그게 나였다.

당연히 깊은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아마도 중학교 때, 단 한번 아빠에게 대들었다가 뺨을 맞아본 것이 아마 서로의 가장 큰 감정 표현이었으리라. 당신이 때리고도 놀랐는지, 집을 박차고 나갔던 아빠는 그날 이후로도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빠를 미워했던 이유도, 아빠를 존경했던 이유도 참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아빠를 용서하지도 또 사랑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무뚝뚝한 부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2년 동안, 밤 10시에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가면 교문 앞에 항상 아빠의 트럭이 서 있었다. 친한 친구 두 명을 집 앞에 떨궈주고 아빠와 나는 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고, 나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부모님은 생계를 이어가느라 바쁜 사람들이었다. 나는 방목 아닌 방목으로 자라났고 지독히도 공부를 안 했었다. 중학교 때는 350명 중에 300등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성적표를 받아보고도 엄마 아빠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고2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내려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백일장이나 공모전에서는, 글을 내기만 하면 수상을 하는 편이어서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단 한 번도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대뜸 엄마 아빠에게 '문예창작과'를 가야겠다 선언했다. 집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 전문대 정도는 갈 수 있었다. 문예창작과는 많은 대학에 있는 학과가 아니었기에 대학에 진학한다면 아주 멀리 가야 했고, 시골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학과임이 분명했다. 내가 글 쓰는 것에 소질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엄마 아빠는 많이 불안했을 법도 한데, 그냥 그러라는 승낙의 말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를 했고, 단시간에 상위권의 성적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두려웠고, 주변에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어른이 없었기에 매일이 불안정했다. 무관심한 엄마 아빠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고3 여름의 어느 밤, 어김없이 야자를 마치고 아빠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상하게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날이었고, 빨리 집에 도착해 몸을 뉘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아빠에게 내색하진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어느 순간, 오늘따라 집이 너무 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슬며시 눈을 떴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집으로 향하는 시내 풍경이 아닌, 트럭은 강가를 달리고 있었다. 놀라서 운전석을 휙 돌아보니, 아빠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늘 방관당해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사춘기. 그러나 그는 나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보고 있었고,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나를 위해, 무뚝뚝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30분간 말없는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게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내 아빠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나 또한 그렇다.


아빠는 내가 1등을 하고 장학금을 받았을 때도, 취직을 했을 때도 "장하다"는 칭찬 한 마디 해주지 않았고, 내가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문경에 갔을 때도 "괜찮니?"라는 위로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암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있을 때도 "아빠 많이 아파?"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고, 항상 돈에 쪼달리던 사회 초년생 시절 문경 집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슬며시 손에 용돈을 쥐어줄 때도 "고마워"라는 고마움도 표시하지 못했다.

우리 둘의 사랑의 모습은 이랬다.

여전히 "아이 씨발"을 입에 달고 사는 미운 아빠일지라도, 아빠와의 첫 드라이브. 첫 시간을 보낸 그 날 이후. 나는 아빠의 사랑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서툴지만 농익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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