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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Mar 12. 2019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

엄마를 닮아가는 딸의 고백

내 엄마의 팔자는 어쩌면,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가난한 집의 2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난 엄마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 언니와 사고뭉치 남동생의 사이에 껴서, 학교에 다녀오면 일하러 간 외할머니를 대신해 밥을 안치고 청소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5남매 중 셋째였고, 위로는 큰아빠 둘, 아래로는 고모 둘이 있었다. 당연히 친척들이 모이면 엄마가 모든 음식 장만과 뒷정리를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첫째 큰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일을 하느라 집에 잘 계시지 않았고, 둘째 큰엄마는 패스트푸드점을 하셨는데 제법 당차고 여장부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달랐다. 지나치게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해서 어딜 가나 말을 아끼고 남의 눈치를 보는 타입이었다. 엄마가 아들을 못 낳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아꼈던 막내아들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는지,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지금은 살만해졌고, 또 예순이 가까워오는 아줌마인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우리 두 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다스러운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늘 시댁 식구들 앞에서 눈치를 본다. 아직도 자식들 앞에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우리 엄마.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내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명절에 혼자 일하고 있는 엄마의 옆으로 슬며시 다가가 "왜 엄마 혼자서만 일해?"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가 제일 막내니까-라고 대답했고, 그런 엄마에게 나는, 나이로 따지면 고모들이 더 어린데? 칫! 하고 돌아섰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많이 속상했었나 보다.

이렇듯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마음에 알게 모르게 말로써 대못을 박곤 하는 아이였다.

가끔 잘못을 해서 엄마에게 혼나거나 맞을 때가 있었는데, 일찍 철이 든 언니는 이유도 모른 채 내 옆에서 묵묵히 같이 맞고 있었다면, 나는 내가 잘못을 하고도 눈을 부릅뜨고 "엄마 대체 나 왜 때리는데??"하고 대드는 고집 센 아이였다.

커가면서 그 고집은 더욱 세졌고, 예민함도 더해져서 부모님은 내가 삐뚤어질까 봐 함부로 혼내지도, 훈계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보는 엄마의 모습이 싫어서 나는 어디서나 당당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를 다닐 때엔 행사나 조별과제를 하면 늘 내가 주가 되길 원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늘 나의 의견을 타인에게 강하게 피력하고자 했다. 성격뿐 아니라 팔자도 닮는 걸 피하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골을 떠나 서울로 왔다. '눈치보지 않는 척', '당당한 척' 그렇게 살아갔다.


당연히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고, 종종 남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엄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한참 예민해져 있을 때는, 내가 얼마나 힘든지는 헤아려주지 않고 무조건 참고 열심히 하라는 엄마에게 "엄마가 뭘 알아? 모르면 가만있어"라는 말로 상처주기 일쑤였고, 심할 때는 직접적으로 가정형편이나 엄마 아빠의 교육 방식을 탓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자꾸 연애나 결혼을 재촉하는 엄마에게 "엄마는 결혼해서 뭐 좋은 거 보여줬다고 자꾸 결혼하래?"라는 기막히게 싸가지없는 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다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 어김없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엄마에게 상처 주는 것- 그건 정말 오래된 '버릇' 또는 '습관'과 같은 거여서,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다.

나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세상에서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을 종종 나에게서 발견하곤 한다.

가끔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지나치게 미안해하다가, '내가 지금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고, 식사자리에서는 주로 에이 저는 선택 장애예요!라고 핑계를 대면서 상대에게 메뉴 선택권을 주는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안 그런 척하면서 어디서나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라 선후배를 떠나서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분을 매일 습관처럼 파악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문경 집에서 엄마와 언니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안주가 줄어드는 속도에 따라 세 사람의 젓가락질이 짠 것처럼 잦아드는 걸 느낀 적이 있다. 상대가 잘 먹는다 싶은 음식, 빠르게 줄어드는 음식은 알아서 내가 덜 먹어주는 배려. 우리 모녀는 그랬다.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닮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습관처럼 독기 있는 말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못된 딸년이지만,

오늘같이 아주 가끔 '철든 밤'이면, 불효자는 마음속으로 울곤 한다.

그리고 엄마에겐 전하지 못할 마음은 이렇게 적어만 둔다. 남들 눈치를 보는 엄마를 닮아서, 꼭 싫은 것만은 아니라고. 늘 남들을 배려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려 깊은 엄마를 닮아서, 이렇게 잘 자라나서, 참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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