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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Oct 23. 2019

나는 긍정력 장애입니다

얼굴에 긍정이 꽃피는 그날까지


세상 사람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면, 나는 여자와 남자도 아닌, 어른과 아이도 아닌,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눌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부류 중 나는 명백하게도 부정적인 사람 쪽에 속한다.

예컨대, 나는 모든 면에서 나 자신을 절하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로또를 살 때도, 프로그램 공모전에 기획안을 넣을 때도, 늘 '된다' 보다는 '안 된다'를 전제했다. 확률은 반반이라면, 그냥 부정적인 생각을 택해 실망과 상처를 줄이고자 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나에게는 '긍정력의 결함'이라는 치명적인 장애가 있었고, '부정'이라 불리는 그것은 병에 병을 낳아 때론 스스로를 너무나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때문에 내 인생의 최대 이슈는 늘 '나는 왜 이렇게 부정적인지, 어떻게 하면 긍정력을 키울 수 있을지'였고, 내 꿈은 다름 아닌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나만의 이슈는 아닐 것이다. 긍정적인 성격은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학습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수많은 연구와 갑론을박이 있었으니까.


학창시절엔 <긍정의 힘>이 인생책이었던 아이러니.


나와 가장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한 사람이 있다. 나보다 3년 일찍 태어났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집에서 같은 경제 수준으로 함께 자라온 나의 친언니.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조건은 대체적으로 같았지만, 신기하리만큼 성격은 달랐다.

매사에 다소 깨칠하고 예민한 편인 나와는 달리, 언니는 상대적으로 둥글둥글하고 무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런 언니가 내 뒤통수에 팩트를 후려치는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저녁 메뉴'였다. 몇 달 전 고향집에 내려가 오후 시간을 보내던 중 엄마가 저녁에 순두부찌개를 끓이겠다 말했고, 나는 무심코 순두부찌개 싫은데-라고 중얼거렸나 보다. 그에, 농담인 듯 가볍고도 간결하게 언니가 건넨 한 마디.

"넌 대체 좋은 게 뭐야?"

뭐라고 재치 있게 받아쳐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맨날 다 싫다고 하면, 좋은 게 있긴 한 거야?"라는 말이 덧붙었다. 말을 꺼낸 당사자는 기억도 못할 테고, 나도 당시엔 그냥 웃어넘기고 식탁에 앉아 순두부찌개를 먹을 만큼 사소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언니가 건넨 그 말은 내내 윗배의 어느 소화기관 언저리를 맴돌았다. 변명의 여지없이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일명 '싫어증'에 걸려있었다.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나의 싫어증의 씨앗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기웃거렸고, 그러던 중 사소하지만 확실한 나의 단점 하나를 더 발견하게 됐다.

실은 나는, 좋아하는 것에 비해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은 싫어한다 말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 말하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이 내재되어 있었던 우리 집은 서로를 향한 감정표현이 풍부한 가정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으로 키웠지만,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고, 반대로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도 크게 혼내기보다는 침묵으로 체벌하는 편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것도 아니고, 훈계받지 않은 채 막 자라난 것도 아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는 걸 배운 대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도 같다.

성인이 되어 홀로서기를 하면서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줄 알아야 손해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싫어'라는 말은 트이게 되었지만, 아직 '좋아'라는 말은 트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건 어쩐지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의외로 싫은 걸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보다, 좋은 걸 좋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부정적인 성격이 '싫어증'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싫어'라는 습관적 표현 자체가 부정적인 성격을 낳은 건지도 모른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언니와 나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성장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나는 자꾸만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고 되새기려 하는 반면 언니는 그 상처를 그냥 묵인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 상처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들춰내지 않는다면 평생을 드러내지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달랐다. 어릴 땐 그저 '타고난 성격의 차이'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실은 '표현의 차이'였고, 그 '표현의 차이'가 곧 '후천적인 성격의 차이'를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 vs 부정


언젠간 퇴근길 버스에서, 얼굴에 부정의 기운이 가득한 중년 여성을 본 적이 있다. 분명 무표정이었지만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아 있었고, 스치는 사람마다 가자미 눈을 뜨고 흘겨보는 그 얼굴은 아주 슬프게 기억된다.

반면,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 꽃이 피어있는 사람들도 있다. 긍정과 여유로 만들어진 단단함, 그리고 유연함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그런 얼굴들은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든다.
 

두 인상은 차이는 고생의 척도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의 척도일 것이다.


실체 없는 싫어증도, 긍정력 장애도, 그렇다 할 결정타 없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건 아니겠지만, 나는 그저, 훗날 그런 얼굴이 되고 싶다. 잘 웃고, 잘 우는 그런 얼굴. 긍정이 가득 꽃핀 그런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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