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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희 Mar 08. 2020

늙고 싶지만 늙고 싶지 않아

나이 들고 싶다는 거짓말


작년 연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오래된 친구였다. 거의 3주 만에 온전히 쉬는 날이었고,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간에 늦어버린 나는 먼저 음식을 시켜놓고 혼자 앉아있는 친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마치 어제 만난 사이인 것처럼 익숙하게 투닥거리는 사이, 나의 곳곳을 틈틈이 훑어보는 친구의 부담스런 시선이 느껴졌다. 헤어스타일부터 운동화 그리고 가방(그래 봐야 노트북 중심의 짱짱한 에코백이지만)까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관찰하는 눈빛을 애써 모른척한 채 흔해 빠진 근황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대화는 계속해서 겉돌았다. 친구는 결혼 상대나 새로 들어갈 아파트, 또는 직장 동료들과의 불화에 대해서 말했고 틈틈이 너 머리 많이 길었다, 살 빠진 것 같다 라고 나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나는 일 얘기 밖에는 달리 말할 이슈가 없었기에 말을 아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의 관심을 이끈, 아니 충격에 빠뜨린 친구의 한 마디.

“야, 박가희! 오늘 보니까 너도 늙었다!”

나는 한 2초가량의 침묵 뒤에 웃었다. 헐!! 진짜?! 하고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지만, 그게 꽤 어색했던 건지 친구는 “아니 얼굴은 그대론데 왠지 느낌이~” 하고 수습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 자신이 너무도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답지 않게 한참 동안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거의 처음으로 내 얼굴을 이리 살피고 저리 살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티비에 나오는 여자들의 주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빨리 나이 들고 싶어!’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었다. 20대 때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다는 말을, 30대가 된 후에는 얼른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는 나이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그러던 내가, 늙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었다니. 그것은 분명 나의 젊음에 대한 자만이었을 것이다. ‘외모’가 늙는다는 것은 고민할 새도 없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어리다는  줄곧 너무 고단한 일이었으니까. 일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랬다. 


일찍 일을 시작해 항상 나이보다 높은 연차 때문에 불편함을 겪었고 최근에도 ‘나이 어린 메인작가’로서 선입견을 이겨내기 위해 남들보다 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쯤이면 마음을 쏟아 상처 받는 일 없이 쿨하고 사려 깊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감을 찾아 당연히 부모님 마음의 짐도 덜어드리고, 여러모로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막연하게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늙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어른’에 대한 동경이 있었지만 어른이 되려면 늙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너 늙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나 늙고 싶어 했지만, 아직 늙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것이다.


그동안 살아오며 미뤄왔던 것들이 꽤 있는데, 술을 줄이는 일이라든지,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라든지.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어른의 이라고 생각되는 일들. 하지만 언젠간 해야 하는  일들을 당장에 회피하면서 어른이 되는 것을 조금은 미뤄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든 이루고 싶은 열정에 비해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삶의 속도가 나를 추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날 이후 화장품을 잔뜩 주문했다. 비싼 갈색병도 사고 아이크림도 샀다. 악건성의 피부임에도 토너와 에센스 기능성크림 등 기초화장품 바르는 시간도 못 견뎌 남자처럼 올인원 화장품만 쓱쓱 바르던 나였는데 말이다. 평소 외모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것 자체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집 밖을 나서면 파우치를 절대 열지 않았다. 점심시간 양치질 후에도, 아무리 더운 여름날의 외근 뒤에도 일부러 거울을 보지도 화장을 고치지도 않았다. 성형수술이나 시술에 대한 대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지루한 티를 내기도 했었다.

‘아 나도 이제 신경 쓰기 시작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냥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시간이 좀 더 빠르게 흘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과, 더 이상은 늙는 게 두려워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놀라운 이중성이다.

하지만 그 이중성은 어쩌면, 늦잠을 자서 택시에서 아이라인을 그려야 하는 날의 마음과 같다.

신호에 걸려서 잠시 멈춰 서라!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아이라인을 그릴 수 있으니까! vs  신호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라인을 못 그려도 지각하지 않을 수 있어!

이 같은 이중성 말이다. 그때는 진땀이 날 정도의 곤란한 상황이지만 어차피 아이라인을 못 그려서 못생기게 출근하는 것, 회의에 지각해서 혼나는 것, 늙는다는 것, 모두 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찰나의 일이니까.

거울 속에서 늘어가는 눈가의 주름을 발견하는 순간, 예전에는 목숨을 걸었던 일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 부모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지금처럼 청춘과 연륜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겠지. 그래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고, 공평하게 모든 것은 지나가겠지.

그러니 너무 연연하진 말고 순간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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