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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May 01. 2020

무말랭이와 골금짠지

할머니가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았다


얼마 전, 골금짠지가 먹고 싶어 마트에서 무말랭이를 샀다.

골금짠지와 무말랭이는 엄연히 다른데, 사실은 같기도 하다. 골금짠지는 무말랭이의 경상도 사투린데 나는 맛으로 둘을 구분한다. 내가 자라면서 먹어온 무말랭이의 맛과, 그것이 아닌 맛. 둘로 나뉜다. ‘짠지’는 김치의 경상도 사투리지만 ‘골금’이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트에서 산 무말랭이는 달기만 할 뿐 아무런 맛도 없었다.

골금짠지는 나의 최애 반찬이었다. 어릴 때부터 편식이 심해 김치라든가 채소 요리를 별로 안 좋아했지만, 골금짠지만은 좋아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시골집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는 내 손에 뭔가를 들려 올려 보내려 했다. “멸치 볶아줄까? 진미채 해줄까? 곰국 얼려서 보낼까?”하고 끊임없이 물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반찬은 골금짠지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건 내가 못하는데- 할머니한테 해달라고 할게-라고 말했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골금짠지를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 덕분이었다.




친할머니에 관한 어떤 기억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두 명의 할머니가 있다. 외할머니는 문경의 시골마을에 계시고, 친할머니는 7년 전, 내가 스물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두 분은 공통점이 많았다. 연세도 같았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혼자 계셨다는 것도 그랬다. 외할머니는 원래부터 문경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 살고 계셨고 친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도보로 닿을 수 있는 시내에 혼자 살고 계셨다.

나는 두 할머니 중,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를 잘 따랐다. 외할머니는 조용한 성격이셨고, 친절하고, 호리호리 세련된 시골 할머니였다. 나는 완전 외탁을 했기에 외할머니와 같이 어디에 나가면 늘 닮았다는 얘기를 듣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기분 좋게 웃으셨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셔서 구순이 가까운 현재까지도 집에는 먼지 한 톨 없으며,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재봉틀로 리폼한 정숙한 정장을 입고 꼿꼿한 허리로 장례식장에 오셔서 또 한 번 모두를 감탄하게 하기도 했다. 반면 친할머니는 조금 다른 이미지로 기억된다. 외모는 후덕하면서도 살짝 무서운 인상이었고, 오 남매 자녀들 위에 지존으로 군림하시는 분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친할머니는 나에게 몇 번 즈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는 2녀 중 둘째 딸인 나에게 고추를 안 달고 태어났다고 등짝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랐을 때는 제사를 앞두고 음식을 하는 엄마 옆에서 튀김을 집어왔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는데, 사촌오빠가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말하자 그냥 튀김을 내어주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 앞에서 엄마에게 타박을 줘서 어린 나를 분노하게도 했었다.

그래서일까. 외할머니에 비해 친할머니에 대한 정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할머니께 가끔 얼굴을 보여드리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가끔은 아빠에게 떠밀려 억지로 할머니께 전화를 하기도 했고, 할머니가 매일 가시는 노인정에 찾아가 일부러 동네 할머니들이 보는 앞에서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편찮으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나는 아주 슬펐고, 펑펑 많이도 울었다. 위클리로 진행되던 방송을 한 주 쉬면서 고향집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명백히도 할머니의 부재보다는 죽음 그 사실 때문이었다. 처음 경험한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리고 처음 본 아빠의 눈물. 그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 뿐, 솔직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는 내 삶에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기억은 왜곡된다


그렇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시간은 흘렀다. 어느 날 고향집에 내려가 밥을 먹는데 갑자기 골금짠지가 먹고 싶어졌다. 엄마에게 왜 요즘은 밥상에 골금짠지가 없냐고 물어봤는데, 할머니가 없으니까 골금짠지를 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하는 거다. 나는 조금 뒤통수가 아렸다.

나는 줄곧 내가 좋아하는 골금짠지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당연히 외할머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친할머니였다니. 나는 대체 왜 당연히 골금짠지의 주인공이 외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조금은 나 자신이 싫어졌고, 다시는 골금짠지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리고 얼마 전. 마트에서 맛없는 무말랭이를 사 먹었던 어느 날, 할머니의 골금짠지를 그리워하다가 기억을 더듬었다.

할머니에게 받은 몇 차례의 상처 때문에 좋은 기억은 묻어두려 했을 뿐, 할머니는 나에게 나름대로의 사랑을 주셨다. 성격상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까다로운 아이였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던 몇 가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나에게 골금짠지만 만들어준 게 아니었다. 어느 날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준 적도 있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초등학생인 언니는 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어린 나는 종종 할머니 집에 맡겨지곤 했다.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선 할머니는 근처의 슈퍼에 가서 동전을 바꿔 식빵을 샀다. 그리고선 기름때 가득한 새까만 프라이팬에 달걀물을 풀어 식빵을 얹고, 설탕을 마구 뿌려 어설픈 토스트를 구워주셨다. 나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내가 훗날 가족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엄마나 사촌언니오빠들은 ‘에이- 말도 안 돼! 할머니는 그런 거 할 줄 몰라!’라고 말하며 믿지를 않았다.


나만이 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화투를 치던 쌀집 할머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용돈을 쥐어주던 옆집 할머니 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할머니는 그렇게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보살펴 주셨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또한 다정했다. 우리 할머니는 마지막 몇 개월을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나는 딱 한 번 그곳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도토리묵을 잔뜩 사서 찾아갔는데,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불러내서 자랑하던 기억이 난다. 사회복지사들은 할머니가 그 날 만큼 많이 웃으신 적이 없다고 했다. 심한 간경화에 치매 증상이 있었지만, 그날은 소녀 같고 건강한 모습이었고 이곳저곳 나를 ‘우리 손녀딸이다. 연예인 같지?’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사랑은 결국, 아래로 흐른다


실은, 별명이 ‘못때이’일 만큼 나는 조금 까다롭고 솔직한 어린이였다. 그리고 훗날 사촌언니에게 들은 얘기지만, 할머니가 종종 ‘가희 그 가시나는 여기 올 때마다 냄새난다고 한다!’라는 푸념을 했다고 한다. 예상해보건대 그 냄새는 여느 할머니집에서 날 법한 특유의 구수한 냄새였을 거다. 자주 가던 외할머니 댁이 워낙 깔끔했기에, 그 냄새가 낯설었던 나는 그저 코를 막고 순수한 발언을 했을 테고. 할머니는 그게 신경 쓰였을 거다. 심지어 반찬투정은 얼마나 했기에, 평생 도토리묵에 막걸리밖에 몰랐던 할머니가 프렌치토스트까지 해주셨을까.


나는 늘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에게 미움받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의 평생을 옭아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할머니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머니에게 준 상처의 무게는 어땠을까. 그 무게는 돌아가신 할머니만이 알고 계실 거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적어도 할머니는 그런 나라도 사랑했다. 여자로 태어난 둘째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운 말을 골라하기 때문에 정이 가지 않는 손녀딸이었을 수도 있지만, 찾아뵐 때마다 늘 함박웃음을 지었고 남들에게 자랑했다. 아래로 흐르는 사랑은, 정말이지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친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주던 할머니보다는 고추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등짝을 때리는 할머니의 모습이고, 할머니 집은 냄새난다고 투덜대던 어떤 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서로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서툰 어느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일 뿐이었다는 것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7년 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국 ‘내리사랑’이라는 것.


외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손을 어루만지고 품을 파고들며 애교를 부리곤 하지만, 친할머니에겐 그래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촉감 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에게,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무말랭이가 아닌 유일한 맛인 골금짠지와 같은 기억이다.


세상을 살아내는데 필요한, 그 짭쪼롬하고 꾸덕꾸덕, 특별한 나만의 맛. 그리고 투박하지만 깊은 맛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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