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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희 Sep 29. 2020

스스로를 끌어안는 마음 - 사려니숲길

나는 교래리에 살고 싶다


한겨울 내린 눈이 아직 채 녹지도 않은 3월의 어느 날. 한라산 아래의 산간마을인 교래리로 들어갔다.    


제주 동쪽의 중산간은 반전의 매력이 있는 곳이다. 멀리서 보면 포슬포슬 촉감이 좋을 것만 같은 오름들이 복닥복닥 모여 있는 깜찍한 풍경인데,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알싸한 숲 냄새와 날카로운 바람으로 뒤통수를 친다. 특히 한겨울의 중산간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겨울 바다처럼 운치 있지도, 한라산처럼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겨울의 중산간을 좋아한다.    


혼자 여행 중이었던 나는 숙소에 배낭을 풀고 근처 식당에서 돔베고기 정식과 막걸리 한 병으로 몸을 녹인 후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입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신성한 숲이라는 명성답게 입구부터 진하디 진한 숲의 기운이 몰려와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유명세가 무색하리만큼 인적이 드문 것은 물론 태고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거대한 숲으로 들어갈수록 마음이 왈칵하고 자꾸만 그 숲으로 쏟아졌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자박자박 내 발걸음 소리만이 커다란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휘육- 휘육-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높다랗게 뻗은 삼나무 사이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사려니에 가면 누구나 그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어 금세 몸과 마음이 그곳에 스며들곤 한다. 감히 사람은 범접할 수도 훼손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장엄함이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지 가늠조차 안 되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신비로웠다. 이토록 매서운 겨울을 지나고 있음에도 초록의 빛을 전혀 잃지 않았다니. 이토록 단단한 숲이라니. 숲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숲에서 펑펑 울었다. 숲의 기운에 완벽하게 압도돼서. 자연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서. 두렵고 무서워서. 이다지도 경이로운 자연이 숭고하고 또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났던 또 다른 이유는 사실, 휴대폰에도 있었다. 사려니에서는 숲의 신비뿐만 아니라 아이폰의 신비도 경험했다. 아이폰의 최대 단점은 온도에 민감하다는 것인데,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면 배터리의 잔량과 관계없이 느닷없이 전원이 꺼지고 만다. 아무도 없는 낯선 그 숲에 나는 휴대폰도 없이 혼자 남겨졌다.     


바람은 점점 거세졌고 얼굴은 콧물 범벅이 됐다. 종종 사람이 지나가곤 했지만, 그것도 무서웠다. 나는 한껏 웅크린 채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숲을 한없이 걸었다. 사려니 숲은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를 그대로 담아내는 곳이다. 바람도 비도 햇살도, 사려니의 대지에 닿는 순간 두 배로 진해져 다시 뿜어져 나온다.


칼바람이 부는 그 숲에서 나는 나를 처음으로 거세게 끌어안았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순간 우뚝하고 멈춰서 주변을 둘러봤다. 음악이 멈춰버린 이어폰은 귀에서 빼버리고 오롯이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뺨에 닿아오는 바람의 손길을 느꼈다. 널따란 활엽수들이 한 방향으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칠고도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이토록 안전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나는 뭘 그리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 하고 스스로가 조금은 우스워졌다.    


생각해보면 이보다도 훨씬 위험하고 거센 바람이 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게 안아달라고 떼쓰지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동안 꾹 참아온 마음이 숲에서 비로소 터져버리고 만 걸까. 사실은 나는 오랫동안 나를 끌어안아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 나는 자주 ‘쫓기는’ 꿈을 꿨다. 꿈에서 사람에게도 쫓기고, 차에도 쫓기고, 원고 마감시간에 쫓기고, 심지어는 벌레에게도 쫓기고, 발가벗은 채로도 쫓겼다. 나는 많이 불안했고 두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추운 겨울 숲에서 두려움에 떨 때, 아무도 안아줄 사람이 없다면 어쩌겠어. 나라도 나를 안아줘야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끝까지 스스로를 힘껏 끌어안으며 숲의 출구를 찾아 걸었다. 4시간을 걸어 간신히 포장도로를 발견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가끔은 바람 부는 숲에 혼자 내던져지는 것도 괜찮구나. 심지어 그게 아름다운 사려니여서 참 좋았다고. 참 잘 걸었다고.    




그날 밤은 온돌 없이 난로와 전기장판으로만 난방을 하는 작은 나무집에서 잠을 잤다. 포근한 이불에 폭 안겨서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근육이 뭉친 다리를 스스로 어루만졌다. 그날은 좋은 꿈을 꿨던 것 같다.    

 

고난 뒤 찾아오는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극한의 상황 뒤에 찾아온 소소한 위로에 우리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 때가 있다. 배를 곯다가 먹은 라면 한 그릇. 불볕더위를 걷다가 만난 생맥주 한 잔. 추위에 떨다가 아랫목으로 파고들 때의 그런 기분. 그다지도 확실한 행복. 사려니숲이 있는 교래리 마을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조금은 얼어붙은 풍경으로 기억되는 그 마을에, 아이러니하게도 온기를 피우고 살고 싶어 졌다. 그 후 교래리에서 하룻밤을 머문 적은 없다. 하지만 근처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그날 사려니에서의 마음을 추억한다. 매섭고도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내가 나를 끌어안으면서, 나는 교래리에 살고 싶다.  조금은 쓸쓸하고 따뜻하게.



2017년 3월.

내가 살고 싶은 산간마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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