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의 서막...나의 이야기
나와 아이들의 일본에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점이 일 년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 4년이 지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무사히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여 2년 차가 되었다.
박사 1년 차에는 논문테마와 방향을 잡지 못해서 정말 막막하고 우울해서
긴긴 터널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주위에 아이들을 키우는 한국인주부들이 꽤 있었지만
나처럼 홀로 자녀들을 돌보며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엄마 엄마하며 찾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오래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엄마와 학생이라는 역할을 해내야 하는 매일매일이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아이들은 밤만 되면 재잘재잘 하루동안의 일들을 내게 쏟아내는데
나는 그 이야기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빨리 자야 공부할 텐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공부를 해도 해도 연구 방향은 잡히지 않았다.
눈물이 없는 나인데 그즈음 빨래를 널면서 개면서 아이들을 재우면서 눈물이 절로 났다.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수십 번 주문처럼 기도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박사 2년 차 시작할 즈음 연구계획이 명확해졌고...
그때부터 박사논문을 위한 조사(research)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귀국 후에 박사논문을 제출하려면 조사를 거의 완벽하게 마쳐야 했기에
나는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틈틈이 학교에서 교수님을 돕는 일, 통역 등의 아르바이트도 했다.
나는 일본에서의 취직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100%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이었기에
그즈음 아이들에게 매일 밤 한국책을 읽게 하고 토요일마다 한국어와 한국사를 배우게 했다.
아이들은 일본어도 잘하고 잘 적응해서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연구실과 지도교수님께도 1년 후 귀국할 것을 말씀드리고
조사 일정이나 학회 발표, 학회지 투고 일정을 조정했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에게 털어놓을수도 기댈수가 없었다.
그의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대학원생 주부인 나는... 여러 면으로 여유 있어 보였을 것 같다.
또한 사회생활의 차갑고 쓴 맛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로 보였을지 모른다.
아니면 나를 믿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나와 아이들의 일본생활의 어려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 대학원관련 이야기를 하면 수화기 넘어 싸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에서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어려운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내가
얼마나 힘겹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단 한 시간도 마음 편히 몸과 마음을 누일 수 없는 상황인지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사회학과 여성학, 특히 케어에 관한 이론을 접하면서...
가족관과 부부관이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점점 그 어떤 것보다 동등한 파트너십을 원하고 있었다.
교회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