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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오늘을 ‘반짝반짝’ 빛나게 살자

18-04

     

  1년 중 가장 쓸쓸한 시기가 11월 하순이 아닌가 싶다. 가을의 여운이 사그라들고 침잠하는 겨울의 충만함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회색지대란 생각이 들어서다. 하늘에 떠 있는 쓸쓸한 낮달과도 같다. 늦가을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친 오후, 집에서 가까운 아차산에 올랐다가 수년 전의 기억에 잠겨 한참을 바위 위에 머물렀다. 3년 전부터 새로 접하게 된 우리 형제들의 낯선 풍경을 떠올리면서.


  가을마다 우리 3형제 내외 여섯이 25년을 함께 한 즐거움인데, 그해 가을엔 큰 형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이는 가장 연장자이면서도 가장 건강했던 분이셨는데, 가장 오래 사실 것이라고 했던 분이셨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폐섬유화라는 어울리지 않는 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셨기 때문이다. 여행 때마다 늘 앞장서서 계획을 세우고 형제들의 먹거리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시던 열정적인 분이셨다. 그러면서 여행은 한 차로 다녀야 제 맛이 난다며 카니발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차 두 대가 동원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제는 카니발 리무진도 마련했는데 타는 사람이 다섯뿐이다. 갑자기 몸집이 훌쭉해진 것 같고, 헐렁한 옷을 입은 것 같이 낯설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생각이 여행 내내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무지하고 무력한 것인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실감했다.   

   900km를 운행하면서 남은 다섯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빈자리의 주인공인 큰 형님과의 추억이 많이 입에 올랐다. 흔히 ‘짧은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그 짧은 인생을 살고도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알 같이 어떻게 그리도 많은 기억과 추억을 남기고 갈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줄기를 당기면 달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추억의 뒤안길로 연신 우리 형제를 불러내니 말이다. 때로는 까맣게 잊힌 이야기까지 물려서 따라 올라왔다. 가을 벌판 위를 그런 기억들로 채우면서 서로에게 묻고 답했다. 우리 다섯이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축대에서 돌 하나 빠지고 나니 갑자기 전체가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그해 가을 산하가 유난히 눈부셨다. 주로 꺼낸 대화의 주제는 이 세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무지했는지 몰라.” “영리하게 살지 못했어.” “그때 일이 너무 후회돼.” 이름은 잊었지만 인생에서 슬픈 것 세 가지를 무지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후회라고 짚었던 시인의 통찰이 새삼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위로 어른거리는 아쉬움, 연민, 미련, 미안함 같은 어휘들. 마치 가을이 참회록이라도 쓰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을은 소란스러운 계절이 아니다. 특히 늦가을은. 단풍 찾아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그러한 행락 철만도 아니고, 곤한 생애를 마치고 바람에 몸을 누인 낙엽을 생각 없이 발로 차고 다니는 그런 시니컬한 날들도 아니다. 우리 몸에 눌어붙은 욕심과 삶의 얼룩을 닦고, 내면 깊이 침잠해 있는 나를 찾아 만나는 절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면 그동안 게을러서 몇 달째 쉬어온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했다.  오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은 절정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경건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은 저마다 빛나 보였다. 단풍 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 무성했던 생명들이 사라진 저 휑한 들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들의 소회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인생도 가을이 짙어졌는데 어디에다 낫을 댈 수 있으려나. 스산한 바람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쉬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우리들 삶이다. 물질이 곤궁한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지만, 광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느껴지는 외로움도 무척 삶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더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이다. 옆에 있다면, 온갖 좋은 것을 다 해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없다는 현실과 마주할 때 갖는 그 열패감은,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끝 모를 광활 광대함만큼이나 깊다.      

  오늘이 그를 사랑할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이 그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을 사는 삶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내일이 불안해 이런저런 핑계로 오늘을 희생하는 삶의 자세도 바뀌지 않을까? 후회는 매번 내일에 의해 일어났다. 책 ‘미래 중독자’를 쓴 대니얼 밀로는 인류가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라는 시간 개념을 만들어낸 뒤, 인간에게 위안보다 불안을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현재만을 사는 동물들에 비해 사람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현실처럼 느끼며 운명처럼 고통을 받고 산다는 것이다.     

  아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다. 내일은 상상 속에나 있는 것. 큰 형님의 빈자리를 느끼면서 내일을 기약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생각 없이 내일을 약속한다면 철부지들 약속이고, 알면서 미룬다면 비겁한 회피라고.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아껴야 할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오늘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겠다. 내일 하려던 사랑은 가불이라도 해서 오늘에 투자할 일이다. 부부이든, 가족이든, 부모형제이든, 친구이든, 아니면 나만의 누구일 수도 있겠다.      


  여행을 통해 확실히 새겨둔 것이 있다.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직진형이란 것을. 미움과 원망의 자리에 위로, 격려, 배려, 사랑으로 가득 채워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이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에 충동을 받지 않으면서 오직 지금 이 순간, 오늘에 충실하자는 ‘카르페디엠(carpediem)'은 그해 가을 여행이 내게 준 최고의 명의(名醫) 처방이다. 지금 내가 사는 시간만이 확실한 내 시간이고 내가 집중할 시간이므로.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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