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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Oct 26. 2024

라크리모사(Lacrimosa) #9

- 중편소설 -

오랜 기간을 건설업에 종사했던 J가 한 중견 건설회사에서 상무로 재직하다 퇴직한 후 어느 영세 건축사사무소에 재취업하여 감리원으로 지방현장에서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지내고 나니 어느덧 그는 이제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결혼이 늦었던 그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아내와 함께 아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아이의 학비와 아내의 생활비를 보내주기 위해 그가 퇴사 후에도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곧 연금생활자가 되겠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에 풀칠할 정도 되는 최소한의 자기생활비만이 될 터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한참을 더 챙겨야 할 가족이 있었다. 


건설회사에 있었을 당시 그는 임원(任員)이 되길 원치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임원은 그야말로 임시직원(臨時職員)의 준말이나 다름없었다. 임원이 되어 계약직으로 전환 되면서 굵고 짧게 가기보다는 그냥 만년 부장으로 가늘고 길게 가기를 원했었다. 그래도 정직원으로 계약연장 걱정 없이 유야무야(有耶無耶) 그렇게 정년퇴직까지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전국의 건설현장을 돌며 소장직으로 버텨오던 그였는데 오십 대에 들어와서 임원 승진은 생각조차 안 하던 그를 회사는 상무로 승진을 시킴과 동시에 업무용 차량과 개인 비서 그리고 자신만의 업무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J가 본사로 출근하던 첫날 평소 안면만 있던 직원들이 멀리서 그를 보자마자 100m 달리기를 하듯 하면서 그에게 달려오더니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그가 본사 직원들의 악수를 받기에도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상무 진급 축하 화분이 놓인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번에 새로 채용한 비서가 고급스러운 찻잔에 방금 내린 커피와 아침 신문 몇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2층 컨테이너 현장소장실에서 종이컵에 달짝지근한 커피믹스를 직접 탄 뒤에 티스푼도 귀찮은지 커피 봉지로 대강 몇 번 휘저은 뒤 구부정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며 커피를 홀짝홀짝 마셔대던 시절이었건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격세지감을 느꼈다. 

왠지 경망스러웠던 그의 건설현장 시절 소장의 모습에서 본사 임원실 상무의 모습은 더욱 근엄하고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게 보이도록 행동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얼마 전 전문사진기사에게 임원 프로필사진을 찍은 적 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자신의 집무실 큼지막한 임원 책상 앞에 근엄하게 앉았다.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만하게 깔끔하면서도 매끈하게 닦인 빈 책상 위에 괜히 빈 결재서류 하나를 놓았다. 앞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일에 열중하는 연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재서류에 마치 사인하는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자연스럽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대부분 전자결재를 하는 마당에 무슨 결재서류 판을 앞에 놓고 있는 건지 자신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있는 표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며 사진기사가 칭찬하자 그가 더욱 함박웃음을 지었고 프로필사진 촬영은 그 환한 웃음 덕에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그가 사진을 받아보고 나서 후줄근한 현장 근무복에서 말끔한 양복을 입고 사인을 하며 웃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만족해하다가 그의 오른손에 든 펜을 보고 이내 후회하였다. 


“사인엔 만년필이지, 이게 뭐야. 제길. 완전 옥에 티네.”


그러더니 곧바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디자인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만년필을 하나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 프로필사진을 자신의 SNS 여기저기에 올려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 하였다. SNS로 소식을 접한 친척과 지인들의 축하가 이어졌고, 무엇보다도 회사 직원들의 축하 메시지가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다. 

그동안 SNS는 그의 주요 소통창구가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살던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과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로 활용했었지만, 그가 상무로 승진이 된 이후 그동안 계정만 만들어 놓고 활용하지 않던 SNS까지 총동원하여 그의 회사생활을 마치 실시간 생중계하듯 하며 소통의 폭을 넓혀나갔다. 

그가 올리는 사진과 글 하나하나마다 직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기 시작하며 좋다는 반응이 수시로 올라오자 J 자신도 그렇게 관심받는 것을 연신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상무 4년 차가 된 어느 날 J의 회사생활을 위태롭게 만든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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