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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Jan 30. 2023

11남매

이제 나도 나이가 좀 들어서,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초조한 심정이 들기 때문일까?


요즘 부쩍 책장 한구석에 처박혀 먼지에 쌓여 있던 오래된 앨범이나 노트를 뒤적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지금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5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의 나와 내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집의 앞마당에는 키가 비슷한 두 소년이 차려 자세로 두 손을 바지에 붙이고 서 있고, 그 앞에 중학생 정도 되는 소년이 두세 살쯤 된 여아를 품에 안고 쪼그려 앉아 있다. 그리고 좀 멀리 나무 기둥에 그물을 쳐서 만든 닭장 뒤로, 대여섯 살된 여자 아이가 툇마루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집은 기와집인지 초가집인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주인공은 4 명이고, 엑스트라가 1 명이다.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배경이 다소 황량하고,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하던 시기인지라, 두툼하지만 다소 남루한 옷에 고무신을 신었다.


이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내 앨범에 꽂히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쨋든 이것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다.



왼쪽에 서 있는 소년이 나, 오른쪽이 두 살 위의 형, 앉아 있는 쪽이 네 살 위의 형, 안겨 있는 아이가 여섯 살 아래의 여동생이다. 그 여동생의 나이로 추정해 볼 때, 이 사진은 내가 막 초등학교 3 학년으로 올라가던 무렵에 찍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뒤에 배경처럼 보이는 여자 아이는, 세 살 아래 여동생으로 여겨진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니, 1965년 겨울, 강원도 영월의 산골마을, 아버지가 학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거운초등학교 관사 앞마당이다.



그러면 다른 식구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 시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형 셋과 누나는 영월 읍내에 얻어 놓은 자취방에서 생활하는 중이고, 막내 동생은 아직 태어나기 전, 여동생 하나는 방에 있거나 어디 놀러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부모님은 어디에?


어쩌면 사진기 앞에 모여 있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은 다산 가정이 흔했던 그 당시에도 매우 드물었던 11 남매다. 그것도 남들이 11 남매라고 하면 자주 물을 때 우리가 대답하곤 했던, 어머니 혼자서 낳은 친형제자매들이다.


얼마 전에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영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던 그 시절에, 우리집은 형제자매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성장했던 다산 가정이라서 나라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는, 나도 전혀 기억 못하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우리집이 이렇게 대식구가 된 것은, 아버지가 삼대독자라서 할머니가 많은 후손을 원했다는 것과, 6.25 전쟁을 겪고난 후 불어닥친 베이비붐, 개발도상국으로 산업역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정부에서 출산 장려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얼마 후에 정부의 정책이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산아제한으로 바뀌어, 우리집은 다소 입장이 미묘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 많은 형제자매들이 말썽 하나 없이 성장해, 모두들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냈으니, 결과적으로 부모님들은 이 나라를 위해서도 정말 큰일을 하신 것이다.



훗날 다들 웃으면서 예전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사실상 그 당시의 우리집은,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형편 없었다.


오죽했으면 부모님들이 자기 소유의 집도 아닌, 학교 관사 마당에 닭장을 지어 닭을 기르고, 학교 실습지에 채소나 옥수수를 심어서 우리들을 먹여야 했겠는가? 지금은 학교 주무관으로 불리지만 당시에는 소사라고 부르던 엄씨는, 종종 우리집의 사적인 일까지 도맡아 해주었다. 사진에 보이는 닭장도 엄씨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먹을 게 부족해서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동생이 마당에서 흙을 파서 먹고 있는 걸 누님이 여러 차례 말렸다는 에피소드는 해마다 열리는 가족 모임에서 단골 메뉴로 남아 있다.


여름에는 바로 집 앞을 흐르는 동강에서 물고기도 잡고 수영도 즐기면서 하루종일 놀았지만, 겨울이면 땔감을 얻기 위해, 형들을 따라 어린 나도 지게를 지고 산을 올랐다. 요즘과 달리 거의 민둥산인데다가, 소나무 같은 걸 베면 산감에게 잡혀간다 해서, 아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잡목을 베어 와야 했다.


그때는 다들 그러했을 테지만, 옷은 형들 것을 물려받고, 또 동생에게 물려주고 하느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자크가 고장나고 여기저기 기운 것들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거의 격년제로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자식들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넷째, 다섯째, 여섯째인 나까지 세 명이 중학교에 한 해 늦게 입학해야 했던 사연은, 우리 가족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이 사진의 배경, 지금은 봉래초등학교 거운분교가 된, 거운초등학교는 남한강의 상류인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영월 읍내에서 동강 상류로 15 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경치가 좋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웃간의 정이 두터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명절 때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자주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곤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호롱불이나 램프를 썼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 날은 밤이 되면 좀 무서워서,내가 이웃에 살던 용구라는 청년을 우리집에 자러 오라고 부르러 다녔던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지금은 차도가 뚫리고 다리가 놓여서, 30분 정도면 시내까지 나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볼일이 있어서 읍내로 가려면 나룻배로 강을 건너고, 벼랑 위로 난 좁은 산길을 거의 하루 종일 걸어서 가야 했다. 짐이 너무 많을 때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서 이곳을 떠날 때 나룻배에 가재도구를 모두 싣고 식구들이 함께 타고, 영월 읍내까지 이동한 후, 다시 트럭에 짐을 옮겨서 이사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이런 악조건이 이곳에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교사들의 수요를 억제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곳보다 오랫동안 여기에 머무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교통은 불편했지만,식구가 많은 우리집이 먹을 거리나 땔감을 구하기에는 상당히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발령지에 따라 한 곳에 3년 정도씩 있었는데, 이곳 거운초등학교에서는 6년쯤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이곳을 떠나 처음으로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비포장 도로를 달린 탓도 있었겠지만, 멀미를 아주 심하게 했다.



내가 어려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주위 사물에 대한 지각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부터, 아버지는 담배는 물론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고, 당시에는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런 자리에 끼는 일도 일절 없었다. 어머니도 예쁘게 화장하거나 고운 옷을 입고 마실이나 다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냐마는, 그저 자식들 보살피느라 한눈 팔 사이도 없이 정말 그림자처럼 사셨다.



이런 우리집 형편이 좀 나아지기 시작한 건, 형들이 다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만 마치고 취업을 하거나 군에 입대해서, 먹을 입이 줄게 되면서부터였다고 여겨진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공평하게 대해서, 남녀 불문하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고등학교까지만 보냈다.


그러다가 10 번째 자녀인 여동생이 형제자매들 중에서 최초로 대학에 들어갔고, 내가 군에 갔다와서 한 해 늦게, 그 다음으로 11 번째인 막내가 대학에 진학해서, 엄밀하게 얘기하면, 부모님이 대학 공부를 시켜준 자식은 모두 3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형제자매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다들 자수성가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딴 가정들은 장남의 출세를 위해 동생들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집은 형들이 동생들을 한동안 집에 데리고 살기도 하고, 옷이나 책을 사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형님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이나 통신대학을 졸업했기에 나는 더욱 죄송스럽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윗사랑은 없다.'는 말이 부모 자식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좀 방황할 때 형들 집을 찾아 다니고, 대학에 다닐 때는 거의 한 해를 형 집에서 기거를 했다. 그게 너무 고맙고 죄송스러워 어쩌다 식사라도 대접하면, 꼭 다시 무엇이든지 돌려주니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다가 나는 늦게 대학에 다니느라 동생들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 준게 없으니, 형제자매들 모두에게 미안하기만 할 따름이다.



1985 년도에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했고, 막내까지 대학 졸업 후 취업까지 마치게 되어, 부모님은 마침내 축구팀 하나를 만들 수 있는 11 남매를 모두 성공적으로 길러내는 대과업을 완수했다. ​


나는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길러내느라,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한 가지도 못하고 지냈다는 게 안타깝다. 물론 예순 정도 되었을 때는 생활에 좀 여유가 생겨서, 조건은 충분했을 테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관성이 그런 걸 허용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등산이나, 낚시, 바둑이나 장기 등, 쉽게 접할 수 있는 취미 활동도 하지 않았고, 틈나는 대로 성경이나 신문을 읽고, 가계부를 꼼꼼히 적는 등, 주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회에 열심이어서 새벽기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해 여기저기 자식들의 집으로 다니기는 했다. 아버지가 현직에 계실 때 다녀온 대만 얘기를 자랑 삼아 가끔씩 했는데, 동남아나 유럽 여행이라도 한 번 보내드리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11 남매는 다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독립했는데,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영월에 있는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채용되어, 그해 겨울에 나도 결혼해서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전남 광양에 있는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는 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고자 하는 막연한 열망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부모님은 내가 떠나는게 한 집에서 다 큰 아들과 지내는 불편함이 사라져서 한편으로는 시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엄청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으리라 생각된다. 11 명이나 키워서, 결혼 후 부모와 한 집에서 산 자식은 나 하나뿐이었는데, 나마저 먼 곳으로 떠나버렸으니.



여하튼 얼마 후, 부모님은 거의 70 년이나 살았던 영월을 떠나, 서울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살고있는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 오기 편하게 하려는 의도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면, 다들 서울의 부모님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여든이 되던 해에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몇 년 후에는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해 오랜 기간 요양원에 있다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셨다.


이제 우리 11 남매는 다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영월로 간다. 해마다 아버지 기일인 8월 28일에는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하러, 어머니 기일인 10월 3일에는 추도식을 올리기 위해 우리 모두의 고향인 영월을 찾는 것이다.



우리 11 남매는 모두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자식들을 꼭 2 명씩만 낳았고, 아직까지 한 집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큰 병에 걸렸던 경우가 없이 다들 잘 살고 있다.


그러고보면 부모님은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 22명과 손자 22 명까지 다 보시고 돌아가셨으니, 고생은 했지만 한편으로는 복 받은 인생을 보냈다고도 할 수 있을 게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아내는 이게 기독교 신앙이 투철했던 할머니와 부모님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나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모두 공평하게, 그리고 유순하게 키워낸 부모님의 가르침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형제자매들이 많다는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큰 힘이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뭐랄까 서로간의 끈끈한 정 같은 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촌수가 똑같은 대상이 너무 많다 보니, 누구에게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생긴 게 아닐까? 형제자매들이 많으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법칙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만약 우리집이 농사를 짓고 있었고, 우리나라가 그냥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 11 남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아마 대다수의 형제자매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굉장히 열악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산업 근대화를 이루어내, 우리 11 남매에게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게 해 준,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 사회가 거의 모계 사회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구조로 여겨진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을 비롯해 우리 가족들 모두가 서울로, 포항으로, 광양까지 흩어져서 떠났지만, 누님만은 홀로 영월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고향을 지키면서, 해마다 찾아오는 형제자매들을 맞이해 주고 있다.



끝으로 우리 11 남매에 대한 글을 내가 꼭 써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형제자매들 중에서 거의 중간으로, 큰형과 11살, 막내와 8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자식들 중에서 나만 교사였던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했고, 또한 결혼해서도 2년 이상 부모님과 한집에서 같이 생활했던 유일한 자식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나이가 아버지가 퇴직한 직후와 비슷한 나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테니스를 치고 바둑도 두고, 여기저기 어울려 술도 많이 마셨다. 50대에는 마라톤과 자전거 투어로, 60대에는 당구와 등산을 다니느라 세월을 보냈다. 해외여행도 20번도 넘게 다녔으니,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식들을 길러내느라, 이런 세상 재미를 거의 한 가지도 누려보지 못하고 떠나신 부모님이 안쓰럽고, 그런 기회를 마련해 드릴 생각조차 못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다만, 두 분 모두 생전에 그렇게 신앙생활에 충실하셨으니,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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