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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Mar 30. 2023

알고 있지만

문득 생각나서 올려보는 육식 반성문

웜그레이앤블루의 일간 연재 프로젝트 <저 여기 있어요> 시즌2 수록글입니다.


아침 일찍 움직이면 동네가 다르게 보인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기 전, 어린이 공원에선 비둘기들이 정모를 한다. 길고양이들은 어슬렁 어슬렁 동네 순찰을 돈다. 가게 문이 하나둘 열린다.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분주함으로 거리가 채워진다. 한 마리 얼리버드가 된 기분을 만끽하며 상쾌하게 걷던 나는 어느 노동의 현장을 마주하고 우뚝 서버렸다. 큰 길가에 최근 문을 연 정육점에 ‘물건’이 들어가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 것이다.


트럭에서 정육점 아저씨의 어깨 위로 옮겨지는 묵직한 그것은, 고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른 단계였다. 아저씨 오른쪽 어깨에 둘, 왼쪽 어깨에 둘. 얼굴을 가운데 두고 양어깨에 네 다리가 가지런히 얹혀 있었다. 목장갑을 낀 손으로 다리를 단단히 잡고 허리를 낮춘 안정 적인 자세로, 아저씨는 씩씩하게 돼지를 가게로 옮겼다. 뾰족한 돼지 발이 아저씨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모습을 마주한 건 고작 2초 남짓이었다. ‘…저게 뭐지?’에 1초, ‘에잇!’하고 시선을 거두는 데 1초. 그 2초가 아직도 선명하다.




부엌 도마 위에 놓인 소 도가니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뽀얀 국물 속 노골노골하고 쫄깃한 건더기가 되기 전, 엄마 손에 집혀 커다란 냄비 속으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 소의 다리를 절단 낸 넓적한 원통형의 덩어리를 보고 “우리가 먹는 도가니가 저거야?? 저 단단 한 게 그렇게 흐물흐물하게 될 때까지 끓이는 거야?”라며 놀랐었다. 비건은커녕 모든 단계의 채식에 무지했던 시절인데도, 그 순간엔 식탁에 앉아있기가 어지러웠다. 원형을 알고 과정을 안다는 게 때론 참 버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도마 위 도가니를 보기 전엔 아무것도 몰랐을까? ‘도가니탕’이라고 불리는 음식을 수도 없이 먹으면서 재료가 무엇인지를 한 번도 인식한 적 없었을까? ‘소의 어느 뭐시기’겠지 어렴풋이 생각하고 넘길 때에도 나는 “아이고, 도가니야”라며 무릎을 만지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었기 때문에 머릿속 인식의 조각들을 굳이 모으지 않았고, 모른다고 믿었을 뿐이다. 


운전을 배울 때 도로주행 선생님이 말했다. “앞을 본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양옆을 다 봐야 돼. 안 보이는 것 같아도, 사람 눈은 다 볼 수 있어.”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시야는 생각보다 넓었다. 내 고개가 정면을 향하고 있을 때에도 내 옆으로 우산 쓴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가로수 잎이 초록색인지 노란색인지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조금만 신경을 넓게 쓰면 되는 일이다. 내가 어렴풋이 불편하게 여겨왔던 진실들은, 열심히 외면하는 동안에도 사실은 내 신경이 닿는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가지런히 썰린 상태로 스티로폼 용기에 담겨 랩으로 둘둘 감긴 ‘고기 한 근’이, 식당에서 하얀 사기그릇에 담겨 가위랑 집게랑 함께 나오는 ‘2인분’이 원래 어떤 모습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 동물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어떤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지 또한 여기저기서 접해왔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아니면서도 자꾸만 최선을 다해 까먹으면서 살았다. 그러다 이렇게 정육점의 아침을 맞닥뜨린 어느 날에는 한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거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믿는 영역은 누구에게나 있다. 볼 수 있지만 안 보인다고 믿으면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데에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쓴다. 그 사각지대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순간 내 안에 작은 불편이 싹 튼다. 그 불편은 아주 사소하지만 의외로 사사건건 마음을 긁는다. ‘알면서’ 그럴 거야? ‘아는 사람이’ 그래도 돼? 너, 지금 하는 행동에 떳떳해? 


올해 초, 한 해의 실천 목표에 채식을 끼워 넣은 건 그런 불편 때문이었다. 고기가 언제쯤 맛없어질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먹는 게 불편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동물 해방’, ‘공장식 축산업’, ‘기후 위기’ 같은 단어를 인식의 사각지대에만 처박아두 는 일이 되레 어려웠다. 완전 채식까지는 감히 엄두를 못 내도 ‘페스코’ 정도는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하루아침에 선언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결심을 깨뜨릴 함정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짜장면 속에 숨은 돼지고기를 씹고 절망하기도 했고, 별생각 없이 면 요리를 시켰는데 고기 육수가 베이스인 경우도 많았다. 평생을 적극적 육식을 하며 살아온 사람의 채식 도전은 한없이 서툴렀고, 정보가 부족했고, 스스로에 실망하며 의지가 자꾸만 깎여나갔다. 결국 지금까지 온전히 지키고 있는 건 SNS에 덩어리 고기 사진을 전시하지 않는 정도다. 


오랜 기간 채식을 실천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입을 모은다. 완벽하려는 부담부터 버려야 한다고. 때때로 실수하고 유혹에 지더라도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부끄러운 간헐적 채식인은 그 너그러움에 기대어 조금씩 의지를 연장한다. 비건은 식습관이 아닌 가치관이다. 먹이사슬을 부정하는 얄팍한 연민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의 철학이다. 이 생각을 외면하려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고 살 때 보단 인류에 도움이 될 거라 믿고 싶다. 뇌가 나 편한 대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려 들어도 불편함의 영역으로 나를 계속 끌고 가는 것.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지 않는 것. 완벽하지 못한 것도 알고 있지만, 알고 있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 또한 말만 앞선 다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20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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