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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photo Jan 25. 2024

미루어뒀던 작별인사를 보내며

우리 가족이 그 집에서 사는 동안 강산이 두세 번은 바뀌었을 거다. 유치원생 때부터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살았으니 참 오래 머물렀던 곳이었다.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 곧 주택 건물을 통째로 허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래. 그 집에 사는 동안 엄마, 동생 지용이, 나까지 우리 셋이 얼마나 고생했어. 잘된 일이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집이 사라지기 전에 집 앞에서 내가 나온 기념사진 하나는 남겨두고는 싶었다. 방학마다 마산에 올 때면 반려견 라떼와 나선 산책길에 그 집이 보이지 않는 주변까지만 겨우 갔다. 그 집에 어린 기억 때문에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 터였다. 다음 방학 때 가면 되겠지, 미루고 미루다가 정말 가보려던 차에 결국엔 집 터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없어진다고?’ 건물이 무너진 터에 내가 두고 온 무언가가 파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헛헛하고 허망했다.


그 집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1층에는 주로 단칸방이 있고 대문 옆 계단을 오르면 2층이 양옆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낮은 옥상이 다른 편에는 방 2개와 주방 하나가 있는 좀 더 큰 집이 있었다. 그 집 위, 그러니까 3층에는 옥상이 하나 더 있었다. 아빠가 옥상에 텐트를 쳐놓고 마음껏 술을 마시던 공간이기도 했다. 전에 누가 똥을 정말 똥 모양으로 아주 큼지막하고도 예쁘게 싸놓고 가서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내게 그 옥상은 한밤에 밴드 옥상달빛의 ‘옥상달빛’을 듣는 곳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그 달빛을 보면서 우리 가족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나의 유별난 감수성을 달래곤 했다. 낮은 건물만 있는 동네에서 옥상이 있는 집에 살았기에 언제든 하늘을 누릴 수 있었다. 돗자리 하나만 펴면 피크닉이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 3층짜리 옥상에 올라가는 일은 그저 낭만적인 일이었기에.


물론 동화 같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세대 주택에 살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이웃에게 서로 들키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일로 어느 집에서 싸움이 있는지, 계속 듣다 보면 심지어 그 싸움의 패턴도 알 수 있었다. 이웃은 술에 잔뜩 취해 난동을 부리는 아빠를 경찰에 신고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이웃하지 않은 집에도 몰래 듣고 본 이웃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소문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경찰에 신고할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가정사는 모르는 척하며 살아가는 사이였다. 우리 동네는 싸움이 잦았고 술 취한 어른이 많았으며 아이들과 엄마들이 숨죽여 우는 곳이기에 그랬다. 무언가 깨지고 부서진다고 해서 누가 죽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때마다 알은척 남의 집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집이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용이와 내가 성장한 만큼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도 커졌다. 다세대 주택 안에서 나름 집을 넓혀 나간 것이다. 대문 앞 단칸방에서 1층 구석의 두 칸짜리 방으로, 시간이 흘러서는 집주인이 살던 2층 집에 살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얼마나 감격했던가. 오래된 집이기에 마룻바닥의 나무가 다 벗겨졌음에도 산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창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고기를 구워 먹던 날도 있었고. 세면대도 없던 집이지만 특대자 빨간 고무대야에 온수를 잔뜩 받아 그 속에 누워 잠이 들면 어느새 엄마가 때를 슬슬 밀어주던 어린 시절도 거기에 있으니. 나는 그 집에 대한 미운 마음으로 건네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이제야 이 글로 늦게나마 보내보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가족을 품어주어 고마웠다고. 월세도 내지 못해 발을 동동거릴 때에도 우리를 쫓아내지 않아 주어 덕분에 따뜻했다고.(물론 웃풍이 너무 심하긴 했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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