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항상 책 읽는 어른들이 있었다. 책 읽는 어른들이라 하면, 고급 갈색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선, 안경 코 받침을 원래 위치보다 살짝 내린 상태로 책을 읽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우리 집 어른들, 즉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그렇지 아니했다. 일단, 우리 집에 소파란 옛 유머로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것’과 같이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었다. 앉을 가구가 없는 탓에 우리 가족은 장판 바닥에 앉아있다가도 곧 고대 로마 귀족처럼 반쯤 누운 상태로 생활했더랬다. 엉덩이뼈가 너무 아렸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함께 살지만 같은 방의 공기를 나누지는 않는 규칙을 고수했다. 아빠의 실시간 위세가 안정적일 때에는 아빠가 안방에서, 나머지 가족은 작은 방에서 지냈다. 아주 지독한 주취를 오래간 풍기는 아빠의 자충수로 위세가 폭락한 이후로는 작은 방이 아빠의 거처로 바뀌었다. 우리 집 어른들은 이렇게 따로 지내도 반드시 함께 공유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집 안의 책. 같이 있기는 지독하게 싫어하면서도 책은 함께 돌려 읽는 그들의 희한한 취미가 어린 내게는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읽던 책에는 조정래 작가의 연작소설집이 주류를 이뤘다. 엄마, 아빠 모두 원하는 공부를 원하는 방향으로 마치지 못했다는 아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길에 떨어진 학습지 전단지를 주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하는 내 모습엔 엄마, 아빠의 어느 유전자도 한몫했을 터였다. 그들이 읽던 책을 잠시만 읽어보아도 한자가 난무하고 역사가 얽혀있는 이야기라 이해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교사가 된 지금 생각해 봐도 연작소설집을 통째로 사 와서 읽을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엄마, 아빠 모두 공부를 즐겁게 했을 것 같다. 물론 엄마는 성적이 좋았을 것 같은데, 비교적 끈기가 없는 아빠가 성적까지 좋았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얘기가 샜다. 암튼! 그때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깡소주에 안주 삼아 읽는 아빠와 연필 대신 미싱기를 돌렸던 시간에 대한 회한을 다스리려 읽는 엄마에게는 왜 제때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을까, 하고 말이다. 진짜 행복해했을 텐데.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은 아쉬워했을 것이다. 종이를 넘기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만큼 우리 집엔 책이 종류별로 잔뜩 쌓여있었다. 새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헌 책방에서 싼 값으로 사 온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책들은 ‘마루’에 모여 있었다. 조그만 우리 집의 안방과 작은 방을 잇는, 거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삐거덕거리는 나무바닥이 있는 곳을 우리는 ‘마루’라고 불렀다. 마루에는 양쪽 벽에 하나씩 긴 책장이, 그렇게 총 두 개가 있었다. 두 책장은 디자인이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고풍스럽고자 하는 나무 책장, 다른 하나는 로코코 양식을 어설프게나마 지향하고자 하는 연한 에메랄드빛 책장이었다. 내 짐작으로선 둘 다 어디서 주워온 책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 책장 쪽에는 엄마가 나 읽으라고 사놓은 청소년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이미 다 읽어버려서 나는 더 읽을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엎드려 독서 중인 엄마가 읽고 있는 책을 슬쩍 훔쳐봤는데 아침 드라마나 연속극보다 더욱 소름 돋게 재밌는 문장을 보고 말았다. ‘시드니 셀던’이라는 작가의 책이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후 배신을 당하고 아주 처절한 복수를 해주는 줄거리에 거기다가 야한 쪽으로 19금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 읽은 세계문학전집에도 물론 호기심을 끄는 문장들이 간혹 있었지만 청소년 버전이라 영 아쉬웠는데 엄마의 책은, 어른의 책은 역시 달랐다. 용기를 내어 엄마한테 나도 옆에 있는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도 되냐고 조용히 물어봤다. 평소엔 엄격하다가도 독서에 있어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허용적이었던 엄마 덕분에 나는 일찍이 극락을 맛보았다. 엄마가 사놓은 시드니 셀던의 모든 책을 엄마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다 읽고선 언제 또 “이 분”의 책을 사러 갈 거냐고 묻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쉬지 않고 읽을거리를 갈구하게 된 건 아마도 내가 막 글자를 읽게 된 시절, 엄마가 동화책 세트와 그 책들의 오디오 카세트테이프를 사주면서부터였다. 특수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내 발달 속도가 느려 또래보다 말을 늦게 시작한 탓에 엄마가 일하러 가는 동안 들으라고 사준 것이었다. 옆에서 이야기책을 읽어주지 못해서 내가 말을 늦게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 엄마가 마련해 준 것을 그때의 어린 내가 신기하게도 알았나 보다. 일을 하러 간 엄마가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거라고 상상하며 글을 읽던 것이 아직도 차례차례 기억이 난다. 오늘의 동화책을 골라온 후에 카세트 옆에 동화책을 가지런히 두고, 동화책 부분이 들어있는 테이프의 A면을 잘 확인한 후에, 테이프를 넣은 후 테이프 보관함을 밀어 찰칵 닫은 후, 카세트 재생 버튼을 누르고, 성우 분과 같이 책을 소리 내어 따라 읽고, 다 읽고 난 후에는 박수를 치며 엄마가 해주듯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테이프를 맨 앞부분으로 되감아두어 다음에 또 이 테이프를 재생할 나의 일을 미리 덜어놓는 일, 그리고 테이프를 정리함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던 것까지 말이다. 특히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도 같다. 책 문장을 읽는 동안 물거품으로 바뀌는 엔딩이 행복한 결말로 바뀌었으면, 해서였다. 그렇게 책을 들으면서 소리 내어 읽고, 내 몫의 책을 다 읽은 후 우리 집 어른들의 책도 다 읽어서 읽을 것이 없어져, 평생 만들 일도 없을 어느 이방인의 요리법도 읽고 또 읽어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지금 무엇이 되었냐고? 월급이 떨어지면 빚을 내어서라도 책을 사는 책벌레가 되었다. 아쉽겠지만 이 이야기는 겨우 이게 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