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 미국 육아, 두 마리 토끼 잡기
두 마리 토끼를 잡기. 한꺼번에 무언가를 탁탁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운명을 기꺼이 즐기는 편이다. 아무리 바쁘고 지쳐도 두 개의 과제를 동시에 해내야 함을 은근히 좋아했다. 겉으로는 투덜거리는 '척' 했을지라도. 아나운서 재직 시절, 아침저녁으로 회사 옆 도서관을 드나들며 미국 유학을 차곡차곡 준비하던 때도 그러했다. 방송을 하는 틈틈이 토플시험 TOEFL과 악명 높기로? 소문난 지알이 GRE (미국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했는데, 시간을 쪼개 쓰는 기분이 꽤나 뿌듯했다. 하루가 알찼고 그래야만 성이 찼다. 도서관 1등 출입에 흐뭇해하며 집중하다가도 점심 생방송 시간에 맞춰 또각또각 출근하고, 방송 하나가 끝나면 내 자리로 돌아와 틈틈이 비는 시간마다 영어 에세이를 한 편씩 쓰고. 두 가지 패턴이 회오리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는 라이프는 그야말로 내 체질이었다. 두 마리 토끼 잡기를 사랑한다. 기꺼이.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기간,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아기 소식이 겹친다면 여러모로 시간을 알차게 시간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 대학원이야 계획대로 학기를 보낸다고 쳐도 임신 출산은 사람 맘과 의지대로 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니, 그냥 상상이라도 해봤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려면 적어도 3번의 학기를 보내야 할 테고, 그 기간과 겹쳐 임신 출산 과정 10개월을 같이 겪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시간 활용은 없지 않을까. 대학원 공부가 곧 태교가 될 테고, 낯선 나라에서의 첫 유학생활에 아기가 든든한 친구 같은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물론 말만큼 쉽지 않을 거란 걸 예감하면서도)
운이 좋았다. 두 마리 토끼 잡기 미션에 워낙 길들여진 사람인 탓일지, 상상만 해봤던 일이 진짜가 됐다. 대학원의 본격적인 첫 학기 시작을 앞두고, 딱 한 달 전 마주한 놀라운 소식. 의료보험 커버 여부와 그 정도에 대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나라, 미국이다 보니 마냥 좋아하고 들뜨기도 전에 '병원을 가는 일'에 촉각이 곤두섰던 바, 다행히 대학원 학기 시작과 동시에 학교 보험이 유효화되면서 타이밍도 좋았다. 임신 출산과 관련된 의료비용에 대해 학생보험 가입자로서 꽤나 유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 학교 개강 이후, 수강과목과 관련된 커리큘럼 질문보다 자연스레 '의료보험' 커버에 대한 질문만 한 가득이었던 나. OB/GYN 첫 방문 시점과 학교 개강 지점이 잘 맞물렸던 게 지금으로서도 참 다행이었지 싶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반 보험 가입보다 학교를 통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하는 학생보험의 혜택이 훨씬 좋다. 한국에 비하면야 보험료 납부액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임신 과정 내내 커버된 내역을 확인하자면, 그저 감탄사가 나올 뿐.) 대학원 입학하길 참 잘했다!
유학생 예비맘, 이건 꼭 필요해
# 1. 혼밥을 잘 감당하는 기술
학생보험 혜택에 감사한 것도 잠시, 지난가을 학기 내내 날 억누른 극심한 입덧의 여파는 학기를 유지해 나가는 과정 속 가장 극한 위기상황 중 하나였다. 임신 초기와 중기, First trimester와 Second trimester가 맞물린 기간 내내, 약 23주 차에 달하기까지 울렁거리는 속에 고생해야 했던 하루하루. 담당의로부터 입덧 약을 처방받아먹기 시작하면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에 달하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체중감소가 상당했고 체력도 하루가 다르게 방전되어갔다. 건강식이든, 인스턴트든, 뭐라도 먹는 게 중요했다. 예민해진 입맛 때문에 동기들이 개강 기념 삼아 같이 식사라도 제안하는 날이면 '너무 피곤해서 나 좀 쉴게', '어머 약속이 있네 어떡하지?' 등등의 흔한 핑계를 둘러대며 혼자 뭘 먹는 게 좋을까 고민 고민해야 했다.
방송일을 할 때는 단 한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M사와 B사의 저렴이 버전 햄버거가 갑작스레 '맛있어졌고', 샐러드와 빵 커피류의 종류만 애정 했던 내가 굳이 '밥'을 챙겨 먹어야겠다며 학교 밖으로 먼길을 걸어 나가기도. B1A4가 부릅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나마 위가 신호를 주는 적절한 '때'를 놓치면 입덧의 후유증은 못 견딜 수준이었으므로. 틈틈이 혼밥을 잘 해내는 기술력을 발휘하는 건 참으로 중요했다. 이때 가장 자주 먹은 M사의 치즈버거, 그리고 보스턴의 사랑받는 로컬 카페, TATTE의 LEMONADE. 너네들 없이는 못 버텼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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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중교통 안을 잘 활용해낼 것
지난해 미국에서 거주하면서부터 '뚜벅이'의 삶을 살고 있다. 차 없이 못 산다는 미국이지만, 보스턴 시내와 그 근교 지역은 대중교통이 참 잘 짜여 있는 편이다. 오히려 도심 속 운전과 주차가 더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아 과감히 운전을 미뤄두고 기꺼이 대중교통 애용자가 되기로 결정! 보스턴 도심 북쪽, 근교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보니 학교가 위치한 보스턴 최중심까지 이동하려면 매일 약 50분가량, 근교 지역과 도심을 연결해주는 통근열차, Commuter Rail을 타야만 했다. 길다면 지루하도록 끈질기게 길고, 짧다면 휴대전화 속 소셜미디어 몇 번만 두드려도 휙 지나갈 수 있는 휘발성 강한 시간. 입덧으로 인한 불쾌감이 멀미까지 촉발하게 놔두지 않으려면 이 시간을 잘 활용해 내는 게 중요했다.
언제, 어디가 됐든, 잠은 보약이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보니 대중교통에서는 웬만하면 졸려도 잘 자지 않는 편이었는데 정 반대의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보스턴 북부역, North Station에 도착할 때까지 약 한 시간 가량 잠을 자고 나면 어찌나 꿀맛이던지. 왜 그 낮잠의 마력을 이제야 알았나 싶다. 멀미를 억지로 꾸역꾸역 버텨낼 필요도 없고 입덧에 메스꺼운 속을 부여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 할 필요가 없으니 진정 보약임에 틀림없었다. 오고 가는 길, 잠잘 수 있는 여유 시간을 반드시 확보할 것. 대중교통에서 잠깐의 꿀잠이 불가능한 여건이라면 학교 휴게실을 활용해 꿀잠용 단골 공간을 확보하는 게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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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수업 끝나면 무조건 집순이 모드
정말 답답할 정도로 '집-학교 동선'만을 반복했다. 보스턴의 전철 T 한 달 정액권을 왜 끊어뒀나 싶을 정도로 학교, 기차역, 집 삼각 코스만 맴맴 돌기. 보스턴 관광 최중심지를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삼각 코스 밖을 '안'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괜찮다 싶어서 이동을 감행했다가는 탈이 나기 일쑤였으므로. 나보다 적어도 8살에서 10살까지도 어린 대학원 동기들은 보스턴에서의 첫 학기, 힙플레이스들을 정복하러 다니기도 바빠 보였지만 언니이자, 누나, 심지어 임산부이기까지 한 나는 기차역까지 향하는 것도 꽤나 길고 험한 여정일 때도 있었더랬다. 한 번은 김밥과 순대가 너무 먹고 싶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식당이 몰려있는 알스턴 ALLSTON까지의 동선에 도전했는데,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됐던 탓에 탈진 직전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다. 김밥 사냥보다는 집순이 모드를 고수했어야 했다. 집에서의 눕눕 라이프가 몸과 정신건강에 좋다. 그리하여 노트북을 톡톡 두드려야 하는 과제도, 중간고사 기말고사 공부도 거의 집에 콕 틀어박혀 누워서만 해결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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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수업의 모든 과정을 '태교'라고 생각해봐
대학원 첫 학기는 그야말로 '모험' 투성이다.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은 여러 수업들과 학교 시스템, 과제 형식들에 많이 익숙해진 덕분에 (잘하든 못하든지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부분이 편안해졌지만... 지난해 가을학기는 고난도의 전공수업을 수강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관이 많았다. 세미나 형식으로 토론하듯 진행되는 전공수업, 그것도 내 전공은 Communication이니!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진행되어나가는 영어토론 형태의 수업은 부담 그 자체일 수밖에. 영어 프레젠테이션 기회도 꽤나 자주 찾아오는 편, 마인드 컨트롤을 수시로 하지 않으면 압박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해나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최면요법을 자주 애용했다. 조금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때때로 잘 통했다. "아들아, 이런 발표쯤은 용기 내서 손들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잘 봐봐"라고 살포시 말을 건네며 손 번쩍번쩍 들기. 발표하다가 영어가 꼬여서 민망한 상황이 생겼을지라도, 낯 두껍게 "뭐 어째 실수해도 괜찮아. 실수할까 봐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더 무서운 거야"라고 알려주기. "어제 발표 잘 못했으니까, 오늘은 반드시 한 건 근사하게 하고 가는 거다" 다시 용기 주기.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기에게 속삭이듯이 마음을 다독여나가곤 했다. 혼잣말과 뭐가 다르겠냐 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이 요법 덕분에 '발표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별 탈 없을 상황'에 스스로 많이 나섰다. (잘. 하. 지. 도. 못. 하. 면. 서!!!) '내 아들이 뱃속에서 이거 다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과감해진 순간들이 많았던 것.
10년간 한국에서 방송일만 하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학생모드'로 변신해 영어만 쓰고 사는 일상에 너무도 서툴기만 한 순간은 많았으나, 좌충우돌 우여곡절 매일매일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그 모든 적응과정이 '태교'라고 생각할 것. 모름지기 임산부라면 평화롭게 좋은 생각만 많이 하라는데, 난 스스로 나서서 '이불 킥'하기 좋은 상황을 만들고 불안+걱정+떨림 3단콤보의 감정을 무수히 겪어내며 강의실에서의 모험을 자처했으니, 아기도 나도 꽤나 스트레스 받았으려나. 대충대충 출석하고 적당히 널럴하게 다녀도 되었을 것을 너무 무리한 건가. 돌아보건대 "아니?!" 적잖이 피곤한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아기 덕분에 용감해진 순간들이 많았고, "엄마가 멋지다는 사실을 보여줄게!!!" 아기를 위해 용기를 내보려 애썼던 진심들이 깨알같이 옹골차게 무르익던 시간들. 누가 뭐래도 '미국에서의 대학원 첫 학기'는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태교임이 분명했다. 했다. 부득이하게 종종 토덧을 해결하려 화장실에 가야 했던 순간이 있었을지라도. (왜 수업에 바짝 집중하고 나오면 그렇게 속이 뒤집히던지!!!)
역시나 운이 좋았다. "입덧도 힘들고 대학원도 힘들어!" 힘듦과 힘듦이 겹쳐져 악순환의 나날들이 되었을지도 모를 약 석 달 반의 시간. 대학원 첫 학기 라이프는 남편의 응원과 보이지 않는 아기가 전달해주는 에너지 덕분에 무사히 연착륙해냈다. 모든 과목 올에이를 따냈음은 아주 '살짝' 자랑해두기. 대학 학부 졸업이 워낙 오래전이라 바람직한 성적표를 거머쥐고 늦깎이 예비맘 유학생은 씬남씬남 그 자체였음을! 성적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임신 초중기와 대학원 첫 학기의 대단한 콤보를 잘 겪어낸 것 같아서 감출 수 없는 웃음만 배시시.
하지만, 결코 이게 끝이 아니잖아. 또 한 번 크게 넘어야 할 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임신 후기, Third trimester를 겪어내야 하는 2020 봄학기. 점점 커져가는 배를 이고 지고, 과연 나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소문난 강추위를 견뎌내며 무사히 학교 다닐 수 있을까. 초기 입덧만큼이나 숨이 차고 체력이 달린다는데, 이거 가능한 미션일까? 미국 유학과 미국맘 라이프, 두 마리 토끼 잡기, 그 두 번째 이야기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