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 미국 육아, 두 마리 토끼 잡기
2020 새해는 한국에서 맞이했다. 학교 겨울방학 기간 친정 힐링을 해보고자 2주 반 정도의 시간을 한국에서 머물렀던 것. 미국의 겨울방학은 한 달가량이 채 되지 않아 상당히 짧은 편이다. 한번 장거리 비행을 한 김에 마음 같아서는 한 달가량 넉넉히 머물다가 오고 싶었으나, 학교의 봄학기 개강일은 1월 13일 월요일. 수업 출석을 위해서 늦어도 개강 직전 주말에는 미국에 돌아와야 했다. 그리하여 11일 토요일 오전, 보스턴 로건 공항 도착. 겨울 날씨답지 않게 섭씨 20도를 육박하는 따뜻한 날씨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은 구석구석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후들후들. 내가 또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유학생의 신분을 잠시 잊고 모국에서 편안히 뒹굴다가 낯선 땅에 이방인 신분으로 들어서자니 확 피곤함이 밀려드는 느낌. 입국심사는 졸음이 밀려오도록 길었고 27주 차 배는 23킬로그램 캐리어만큼이나 둔탁하게 무거웠다. 그렇게 다시 미국 땅에 입성.
쉴 새 없는 입덧, 그 고난의 행군 속에 대학원 첫 학기는 무사히 견뎌냈는데 봄 학기는 어쩐다지? 본격적인 임신 후반기. 다들 안정기라고는 말하지만 배가 점점 무거워지다 보니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건 당연지사. 조금만 동선이 확장되어도 쉽게 지치는 날들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수업이 모두 오후 늦은 시간대에 배치돼 있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은 덜했지만 밤 시간대에 끝나는 수업은 남편 픽업 찬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내 수업 끝나는 시간에 딱딱 맞춰 보스턴 도심까지 달려 나와야 했던 남편에게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
사실 봄학기를 정상적으로 이수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봄학기는 1월 중순부터 4월 말엽까지 이어진다. 학교에 따라서는 5월 초까지 이어지기도. 임신이 이어지고 있는 기간 중, 어떤 돌발변수가 생길지도 모를 일.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출산일이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고 의료진의 소견에 따라 학교 출석 대신 집안에서의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 아기가 예정일 그대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모든 상황이 변수 그 자체였다. 남편은 미리 내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담당교수들과 학사과 담당 DEAN과 면밀히 상황 대처에 대해 논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봄학기의 일인데 굳이 학기도 시작하기 전부터 화두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 의아했으나 남편의 말이 100% 옳았다. 이곳 사람들은 특히 자신에게 벌어질 상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미리' 대응하는 걸 좋아한다. 은근슬쩍 쉬쉬하며 문제 상황을 좋게 좋게 해결하는 문화가 아니다.
봄학기 수강할 과목에 대한 신청을 마치자마자, 11월 무렵부터 학사과 담당 DEAN과 정기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대학원 내 나와 같은 임산부 학생의 사례가 있는지, 임신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빚어질 수 있는 결석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성적 취득과 학위 이수에 불리한 점을 없을지 철저히 따져보기. 더불어 DEAN을 통해 다음 학기 내 담당교수들에게 내가 어떤 변수를 가지고 있는 학생임을 알리고 휴학 절차 없이 무사히 당신들의 수업을 듣는 데 협조해 줄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공식 메일이 전달되었다. 나와 같은 임산부 대학원생들의 성공적인 졸업 사례들도 접할 수 있었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학과 교수님들의 반응 또한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일단 봄학기 수강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 하지만 이건 결코 끝이 아니었지. 임산부 학생이라는 핑계로 대충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학생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유학생 예비맘, 이건 꼭 필요해
#5. 개강 직후, 교수님 껌딱지 되기
1월 13일, 드디어 개강일, 낮과 밤이 바뀐 탓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꾸벅꾸벅 졸며 등교. 머리가 팽글팽글 돌고 있는 와중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듣는 학과목 교수님들님들과 첫 주 상담 일정 잡기. 첫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남아 "이미 지난번 메일을 통해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 운을 뗀 뒤, 내가 그 'Ellie'라는 학생이고 현재 임신 몇 주차에 접어들었으며 예정일은 언제이지만, 이번 학기 최선을 다해 성공적으로 모든 프로젝트를 마치고 싶다는 의지를 또박또박 밝혔다. 모든 교수님들은 자. 애. 롭. 게 "Baby comes first"를 외쳤다. 그 어떤 과제가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더라도 네 인생에서 너의 아기만큼 중요한 건 없다며, 따뜻한 축하인사를 덧붙여 가면서. 혹시라도 수업을 따라가기에 너의 상황이 조금 불리할 수도 있겠다며 내심 반갑지 않은 눈초리를 받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기도 했는데, 되레 너그러이 나를 다독여주는 마음 씀씀이에 감탄해버렸다. "내 손자도 올해 7월에 나와. 나도 할아버지가 된다고!" 하셨던 석좌교수님부터, "난 있지, 30년 전에 7주나 아기가 빨리 태어났어. 아기 예정일은 아기가 정하는 거야. 힘든 일 있으면 얼마든지 상담하러 오라고" 흔쾌히 쿨한 모습을 보여주신 학과 디렉터 교수님까지. '우려'보다는 '격려'를 마주하며 봄학기 첫 주에 무사히 안착했다.
물론 이렇게 너그러운 확답들을 듣고 나서도 나의 교수님 '껌딱지' 일상이 계속되었음은 안 비밀. 이토록 교수님 연구실을 자주 들락거렸던 적이 학부시절에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틈만 나면 메일을 보내 '귀찮도록' 수업계획서에 나와있는 일정을 문의하고 내 경우, 미리 3월까지 과제를 제출하고 싶으니 혹시 대체 과제나 보충 과제를 먼저 나한테 내줄 수 없는지 적극적으로 나서 '일을 만들었다'. "교수님, 이 과제는 4월 15일까지가 마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부터 미리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습니다만.", "교수님, 이 퀴즈는 4월에 예정돼 있는데, 출산 뒤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퀴즈에 대한 대체 과제를 부여받는 게 가능할까요?", "교수님, 이건 그룹 프로젝트로 진행될 텐데 출산 이후 발표 현장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개인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건 어떨지요.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미리 준비해보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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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제는 몽땅 3월에 끝낸다! 미션 컴플릿.
앞서 말했듯, 모든 과제와 발표 프로젝트를 3월 안에 끝내는 게 내 목표. 초산이라 컨디션을 예측하기는 힘들었지만 예정일이 자리 잡고 있는 달, 4월엔 아무래도 학업에 올곧이 집중하기는 힘들 거라는 계산이었다. "과제를 미리미리 끝내는 게 좋겠어"라고 모호하게 의지만 챙겨두다간 시간이 흐물흐물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단단히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두었다. 마감일이 최대한 늦은 과제부터 2월에 차근차근 해결하기 위해 '나만의 due date'을 새로이 적어두었다. 이를테면 4월 21일 마감인 과제는 나 혼자 2월 21일까지 해치울 것. 4월 30일까지 끝내야 하는 파이널 프로젝트는 3월 둘째 주 봄방학 마지막 날까지 꼭 끝내 둘 것! 이런 식으로.
발표 역시 미리미리! 발표 순번을 정할 때는 무조건 앞선 날짜를 쟁취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아무래도 네이티브 학생들보다 발표 부담이 더 될 수밖에 없는 '어리바리한' 유학생 신분이다 보니 이건 분명 좀 뜸한 일. 보통 같았다면, 최대한 중간지점에서도 다소 늦은 순번을 골랐을 텐데,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쨍쨍할 때, 그러니까 임신주차가 더 흘러가기 전 에너지가 조금 더 빵빵할 때 발표하고 싶은 욕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누가 먼저 자원해서 발표할 사람?" 같은 질문에는 무조건 손부터 들었다. 참 겁도 없지.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손드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의무가 아닌' 발표 프레젠테이션마저 꼬박꼬박 하겠다고 나섰다. 수업 후반부에 느슨해질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초반부에라도 열심히 나서는 학생이 되고 싶었던 것. (결과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나서는 학생이 되었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혹여 망치더라도 일단 나서서 먼저 하기. 그러다가 집에 오면 종종 남편 옆에서 이불 킥 팍팍.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유학생 예비맘, 이건 꼭 필요해
#7. "교수님, 저요, 진짜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자꾸자꾸 호소해주기
잘하든 못하든, 손을 번쩍번쩍 들어 무언가 시도하는 습관이 장착됐다. 수업 참여도 '습관'이다. 나 역시 처음부터 적극적인 학생일 리는 만무했다.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내에서 인터내셔널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는다는 건 꽤나 많이 위축되는 일이다. 원어민 학생들의 자유자재의 거침없는 커뮤니케이션 파도 속에서 국제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말수가 적고 다소 소극적인 편. 그럼에도 생각했다. "혹시라도 아기가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태어나 수업에 생각보다 많이 참여하지 못한다면 어쩌나? 그렇다면 원활하게 참여할 수 있을 때만이라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임해봐야지"라고. 대학원 수업은 대개 토론으로 이뤄지는 세미나 형식이어서 모든 건 본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편히 가려면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수업은 잘 흘러간다. 아기가 있어서 고단하다는 핑계에 기대 편히 가고 싶진 않았다. 정말 '열심히'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고 싶었다. 이 또한 아기에게 발표력을 길러주는 '태교'라고 믿어보고.
물론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내가 생각한 무언가를 자랑하듯이 보여주고자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입을 꾹 다문 얌전한 유학생이고 싶지 않아서 '필수'가 아닌 리서치도 틈틈이, 굳이 안 해도 되는 발제 준비도 꼼꼼히 해나갔다. 더불어 교수님들에게 '임산부 학생 Ellie'가 아니라 '임산부이지만 과하게 열심히 해서 걱정되는 학생 Ellie'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도 살짝! 교수님이 먼저 제안하기 전에 미리 과제를 하겠다고 나서서 찾아오고, 굳이 시키지 않았지만 이 연구과제가 흥미 있는데 이걸로 발표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자발적 제안을 하는 학생을 교수님들이 싫어할 리 없었다. (귀찮지 않으셨으리라 믿고 있다) 흐물흐물 편히 가는 학생이고 싶지 않아서 세웠던 내 전략들이 결국 날 어느 정도 단단하게 키우는 데도 한 몫했을까. 아직 봄학기가 완전히 종료되지 않아서 최종적인 결과를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1,2,3월 지독하도록 알차게 보낸 봄학기, 예정일을 딱 나흘 남겨둔 지금 돌아보건대 '후회는 없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학교의 모든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어버린 요즘. 보스턴의 모든 대학들은 굳게 문을 걸어 잠갔고, 임산부 학생이든 그렇지 않든 3월 중순부터 4월 종강에 이르기까지 학교 출입을 할 수 없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오히려 임산부 학생으로서는 친화적인 강의 환경을 마주하게 된 셈. 바이러스 노출을 차단하면서 집안에 누워서도 리모트 강의 접속이 강의하니, 이런 식으로 라면 출산병원에서도 '진통'시간만 피한다면 강의 접속이 가능할 것 같으니 말이다. 출산하고 난 뒤 종강일까지도 집에서 강의 수강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 결과적으로는 봄학기를 무사히 마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다. (나 지난해 11월부터 철저히 상담받고 준비했는데?) 어찌 됐든 교수님의 '배려'를 따로 구하지 않더라도 학기 이수가 온전히 가능하게 되었으니 다행 중 다행인 셈. 출산 이후 출석하지 못하게 될 상황에 대비해 미리 모든 과제와 발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다 해버린 건? 어쩌나. 그냥 성실한 한 학생의 열정으로 남아버렸네!
미국에서의 대학원 생활이 두 번의 학기를 지나는 동안, 임신 극초기에서 예정일 나흘 앞둔 지금까지의 시간이 뜨겁게 번져 올랐다.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며 '해낼 수 있을까' 우려했던 시간들, 두 마리 토끼 잡기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덧입고 종종 '용기'라는 새롭게 변형된 형태를 내보이며 내 앞에 교실 속에 떡하니 등장하곤 했으니 어찌 이 매력적인 과정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5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여름학기'도 나는 작정하고 수강해볼 생각이다. '신생아 육아'와 '계절학기 수강'을 병행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지인들의 반대의견을 종종 접했으나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니 '용기 내면 못할 게 없으리라'라고 또 한 번 욕심내 볼 예정. 미국 유학 중에도 두 마리 토끼 잡기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