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수현 Jun 22. 2020

아기 때문에, 아기 덕분에

좌충우돌, 미국맘 성장기

여기 두 가지의 명사가 있다. '때문’과 ‘덕분’. 어떤 상황의 앞뒤 인과관계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둘 중 무엇을 쓰더라도 얼핏 큰 의미 차이는 없어 보인다. 어쨌든 A라는 상황이 그 후에 벌어질 B라는 상황에 영향을 준다는 뜻일 테니. 다만 한 사람의 입에 담길 때 그 문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이것 덕분에 이렇게 되었어. 후자의 경우, 어떤 상황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 들어설 수 있다면 전자의 경우, 무언가를 탓하는 듯한 느낌까지도 잔뜩 밸 수 있다는 것.


문장 안에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같은 기능을 해내지만 사람의 마음을 담는 데 있어서는 참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두 단어.


아기를 키우다 보니 한 순간 한 순간 변수가 참 많다. 변수가 깃든 상황을 설명하려다 보면 자연스레 인과관계가 담긴 문장을 쓸 때가 잦아진다. "아기가 갑자기 이유 없이 '으아앙' 울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달래다 보니 방이 이렇게나 지저분해졌네." 또는 "아기가 오늘따라 너무나 '방긋방긋' 날 보고 웃고 있지 뭐야. (그래서) 놀아주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결국 대학원 과제할 시간도 없이 하루가 다 지나가버렸네?" 결과를 빚어낸 결정적인 상황의 주인공에 '아기'가 놓이는 이런저런 경우들. 이럴 때 (그래서)의 자리에 어떤 부사가 자리할 수 있을까.


"아기 때문에
방이 이렇게 지저분해졌어"
"아기 때문에
결국 과제할 타이밍을 놓쳤어"


미국 대학원생 라이프와 미국맘 라이프를 동시에 해내고 있다는 것.  때문과 덕분 사이를 자꾸자꾸 서성거리는 날들


나도 모르게 '때문에'라는 말이 앞설 때가 종종 있었다. 딱히 아기를 탓하거나 원망하려는 의도가 담긴 건 아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때문'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던 것. 이제 겨우 생후 70일을 갓 넘긴 아기. 그 어떤 상황도 아기의 잘못인 적은 없었다. 그저 아기도 나도 이 세상 속에서 새롭게 주어진 역할 모델에 충실히 적응해나가고 있을 뿐인 것을. '때문'이라는 단어가 얹히면서 왠지 말 한마디의 뉘앙스에 '원망'과 '짜증'이 담기는 것 같았다. ‘때문에’... 한 마디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순간, '이건 아니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엄마, 새벽3시라고요? 전 도무지 잠을 잘 생각이 없답니다.”


아기와 함께하는 삶 속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변수는 요컨대 바로 이런 것. 새벽 두세 시, 다소 어정쩡한 시간대에 눈을 번쩍 뜨는 아기. '나 기분 좋으니까 엄마도 나랑 같이 놀자' 하고 말하는 듯 두 눈 가득 '방글방글' 함을 담고 있는 그 느낌. 쪽쪽이를 물리고 토닥토닥하고 나면 또 금세 잠들 것도 같지만, 아기가 마냥 예쁘기만 한 초보 엄마는 그 선한 눈빛을 뿌리치지 못한다.


연애 초기 남녀가 오묘한 썸을 타듯, 아기와의 설렘을 열정 다해 주고받는 새벽 3시. 아기의 왼쪽 손바닥과 내 오른 검지 손가락이 맞닿는 시간, 새벽 4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아기가 비로소 쌔근쌔근 잠들 무렵, 새벽 5시. 그렇게 새벽 시간대를 충실히 '엄마'로 보내고 난 뒤 대학원생 모드로 돌아가자니 숨이 차다. 아직 꼭두새벽인데 하루를 다 보낸 것만 같은 느낌. 이럴 때 나도 모르게 할 수 있을 법한 한 마디.


아,,, 아기 때문에
오늘도 밤잠을 설쳤어.

앗, 이런. 단지 '때문'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아기는 한순간에 원망의 대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다. 부정적인 생각은 특히 전파력이 강한 법. 자꾸만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타고 들게 만든다. 마치 이렇게 말이다. '너만 잘 자주 었다면 난 푹 자고 아침 일곱 시쯤 일어나서 상쾌한 느낌으로 대학원 과제를 시작할 수 있었을 거야', '결국 너의 잠투정에 내가 이토록 피곤한 거야', '아기 때문에 대학원 여름학기가 엉망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등등. 이건 아니잖아! 초보 엄마에게 육아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참 모순적이게도 아기는 세상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1분 1초.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런 반갑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려 한다니. 결국엔 '때문'이라는 단어의 문제다.


“너 때문이 아니야. 너 덕분인 거지.” 이렇게 환히 웃는 네 모습 덕분에 모두 잠든 새하얀 새벽마저 경쾌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거든.


아,,, 아기... 때... 까지 몇 음절을 입 안에서 오물거리다가, 꼭꼭 씹어 잘 삼켜본다. 그리고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음미해보는 몇 마디의 마음들. "우와... 아기 덕분에 모두 잠든 새벽에 이토록 설렐 수 있다니!", "아기 덕분에 세상 이토록 '가득 찬 느낌'으로 행복하게 밤을. 새워보다니!”


때문과 덕분. 단어 두 음절을 바꿔 썼을 뿐인데 마음가짐은 확 달라진다. 우리 아들 덕분에 (밤잠은 설쳤음에도) 나는 새벽 다섯 시쯤부터 미라클 모닝을 열머 하루를 일찍 시작할 수 있었고, 우리 아들 덕분에 (수면부족일지라도) 한가로운 새벽에도 누군가와 뜨겁게 소통할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한 시간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반어법'을 활용해 비꼬려는 게 아니다. ‘덕분’의 마법이다.

너 덕분에 느끼는 새로운 감정들. 너 덕분에 마주하는 신기한 풍경들.


'덕분'이 가져다주는 마법을 자꾸자꾸 되뇌며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부모님 찬스 쓰지 않고 남편과 단둘이 해나가는 육아, 대학원 유학생활을 겸하면서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기아기 한' 아들을 키우는 날들. 앞으로의 순간들에 더 강도 높은 '힘듦'이 찾아든데도 '때문'보다는 '덕분'을 입에 자주 올리리라 마음을 다잡아둔다.


아기 때문에 내가 계획해둔 일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아기 덕분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시간들이 자연스레 찾아들고 있는 거니까. 네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랬을, 따분하고 단조로운 내 삶이, 너 덕분에 경이로운 변수들을 마주하며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 거니까.


참! 깜빡했네
그리고 너 덕분에
이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

미국의 Father’s day. 너 덕분에 새롭게 다가오는 기념일도 있네!
너 덕분에 선물 같은 하루
별 것 아닌, 잠깐의 산책마저도 너의 존재 덕분에 더 소중해
이전 11화 기억해? 처음 손 잡은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