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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Sep 03. 2023

디즈니도 자폐를 그린다면

거북맘 프렌들리 존 (2화)

“넌 어떤 공주 좋아해?” 여자 아기들에게 꼭 한 번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공주 놀이’. 누군가는 새하얗고 청초한 백설공주를, 누군가는 발랄하고 씩씩하면서도 책벌레를 자처하는 <미녀와 야수> 속 벨을 꿈꾼다. 2014년 <겨울왕국>이 개봉한 이후로는 주인공 엘사의 코스튬이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였다. 미국 디즈니 숍에 가면 하늘 빛깔의 엘사 의상이 맨 앞에 가장 많이 걸려있었으니까. 한두 해의 일은 아니다. 나도 어릴 때 한창 공주들을 좋아했다. <알라딘> 속 재스민을 좋아해서 인형놀이를 하다가도 공주 인형들의 의상을 재스민이 입은 드레스처럼 모두 오프숄더 형태로 바꿔 입혔다. 성별 고정관념이 많이 옅어진 요즘이고 꼭 모든 아이들이 공주를 좋아하란 법도 없지만, 어쨌든 수많은 공주가 등장하는 디즈니의 콘텐츠는 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내 딸에 이르기까지 세대 불문 참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다.


디즈니가 품어왔던 다양한 공주들, 우리는 각각 어떤 주인공을 가슴 한 켠에 품고 있을까.


단, 디즈니에도 변화는 있었다. 야리야리한 자태의 새하얗던 공주들, 시간이 흐르면서 피부색이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했고 설정된 무대의 지역도 다양해졌으니까. 깡마르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했고 원래 존재했던 공주도 성격을 조금 달리 한 채 재탄생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하나 둘 실사화 되면서 캐릭터에 색다른 호흡을 불어넣은 것. <미녀와 야수>의 벨은 ‘엠마왓슨’이 연기하면서 위기가 닥쳐도 강단 있는, 세상 더 씩씩한 벨은 없을 것 같은 아가씨로 재탄생했고, 2019년 나오미 스콧과 만난 <알라딘> 속 재스민 공주는 조용히 숨죽인 채 지내는 삶을 추구하지는 않겠다며 더 독립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왕자님이 짠 나타나서 숲 속의 공주를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신데렐라에게 구두를 찾아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점점 수면 아래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


더불어 새롭게 탄생하는 디즈니의 이야기들은 북미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엔칸토>는 콜롬비아의 깊은 산속 이야기를 그렸고 <모아나>는 폴리네시아 신화를 기반으로 가상의 장소 모투 누이 섬을 배경으로 삼았다. <코코>는 멕시코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주인공. 물론 1998년 개봉했던 <뮬란>은 중국이 배경이요, 1992년 탄생했던 <알라딘> 캐릭터는 디즈니의 몇 안 되는 유색인종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주인공이 탄생할 때마다 주목하는 세계가 더 다양해져가고 있음을 실로 느끼게 한다. 주인공들이 공주라는 지위에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같은 영화임에도 애니와 실사 사이, 옛날 공주와 지금 공주가 다름을 느끼게 하는 디즈니. 문화적 다양성을 한껏 반영하려 의도적으로 애쓰고 있는 게 보이는 디즈니. 그렇다면 여기에서 더 다양해질 수 있을까. 문화적 다양성을 넘어서서 ‘자폐’의 영역도 감당할 수 있을까.


디즈니가 더 다양한 걸 그려낼 수 있을까
자폐도 그려낼 수 있을까


디즈니가 ‘자폐 스펙트럼’을 다룬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ASD (Autism Spectrum Disorder) 캐릭터가 시나리오 안에 담긴다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졌다. 꼭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디즈니라는 거대 콘텐츠 기업이 ‘자폐’의 영역을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전 세계 수많은 관객에게 그 어떤 마음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자폐스펙트럼’이라는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영역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속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과 인권에 대한 고려. 그들을 위해 소소하게나마 할 수 있는 배려. 사람들이 자폐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조금씩 친숙하게 느끼는 것부터가 큰 시작이 될 테니까.


디즈니의 성 안에도 자폐스펙트럼 징후를 내보이는 주인공이 사뿐 사뿐 걷는 날이 오게 될지.


천재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도 그러하지 않았나. 드라마 속 우영우가 겪는 어려움과 불편함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이 이야기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디즈니도 그런 포용성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 이미 어른이 되어 훌쩍 자라 버린 사람들을 사로잡아본 이력이 있는 거대 콘텐츠 기업이 아니던가. 이들이  ‘자폐’를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면 자폐를 바라보는 뜨악한 시선, 막연한 공포로 뒤덮인 편견도 우영우 때만큼이나 사랑스럽게 녹여버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만 같다.


쉽지 않은 일임은 너무 잘 안다. 새하얀 공주들이 주를 이뤘던 과거의 디즈니에서 다양성을 고려해 인종과 국가 등의 가치를 뛰어넘는 시도를 지금껏 해왔다고 한들, 장애의 영역을 건드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닐 테니까. 훨씬 더 조심스럽고 예민한 영역일 거다. 아무리 공정하려 노력해도 일련의 ‘편견’ 어린 시선이 실릴 수 있다. 좋은 의도로 그려내기 시작한 캐릭터가 오히려 실제 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과 가족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희화화될 수 있고, 지극히 신경 썼어도 캐릭터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자폐스펙트럼 장애의 현실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거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시도일 테지만, 부분적으로 비판을 받을지라도 의미 있는 도전이다. 디즈니 기존의 대표 공주를 뛰어넘는 모아나와 엔칸토가 태어난 것처럼 아무도 상상 못 했던 자폐 캐릭터도 사랑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자폐를 바라보는 뜨악한 시선
막연한 공포로 뒤덮인 편견도
우영우 때만큼이나 사랑스럽게 녹여버릴 것 같다


미래 언젠가는 태어날 그 캐릭터를 미리 응원해보기로 한다. 디즈니 주인공의 얼굴색이 다양해지고 몸매가 한층 더 현실적인 자태가 되고 주인공이 활동하는 문화권의 영역이 확장되어 왔듯이, 언젠가는 장애와 비장애의 영역이 허물어지고 ‘통합’의 영역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자폐스펙트럼 징후가 있는 Autistic 한 주인공이 짠 등장 해 줄지 모를 일이다. 사뭇 진지한 다큐멘터리 속의 ‘자폐’라는 화두가 아니라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콘텐츠 속에서도 ‘자폐’를 스스럼없이 만나고 싶다. 그렇게 ‘자폐’라는 키워드가 대단히 특별하지 않게 등장해 줄 수 있는 세상이 곧 찾아든다면 더 좋겠다. 이상하고 기괴하지 않은, 그저 조금 더 예민하고 특별한 기질을 가진 이들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더 판판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 어쩌면 자폐일지도 모를, 우리 아이가 자라날 세상은 그러했으면 좋겠다. 2022년 우영우가 사랑스러웠듯이, 수년 뒤 더 러블리한 디즈니 속 Autism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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