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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29. 2019

[식食] 처음 미역국을 끓이던 날

보스턴에서 먹고살아요 (2) - 남편 생일상 차려주던 그 아침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어야지"

전화기너머로 들려오는 친정엄마의 압박. 그 한 마디에 잠시나마 잊고 있던 생각들이 새까만 먹구름이 되어 내안에 달려들었다. 남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 전쯤만 해도 자신있게 "아내가 당연히 해줘야지"라고 소리냈는데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오니, 호언장담했던 내 입이 조금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미역국 안 먹어본 지가 언제야.' 아마 30여 일 안에 뭔가 방법이 찾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뭘 믿고 그렇게 미역국 요리에, 아니 조리에 별 걱정을 안했던 건지 때론 이렇게 '질러놓기'를 잘하는 나란 여자. 나도 잘 안먹는 음식을 누군가에게 해준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여기 미국에서. 물론 와이파이 잘 터지겠다, 블로그에 레시피를 두드려보면 당연히 몇 초 안에 짠, 하고 레시피가 등장하겠으나 이건 요리법을 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해봤던 일을 하려니 머리도, 몸도 딱딱하게 굳어오는 느낌. 부엌에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 자신이 없었다. "말했잖아요. 나 한국 음식 잘 안 먹는다니까요."

 


[식食] 한인마트의 미학 편을 다시 읽으려면  

      ; http://brunch.co.kr/@bostondiary/17


에잇,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출국 전에 O마트나 XX마트 들러서 '3분조리 미역국 패키지'라도 살짝 캐리어에 넣어올 것을. 23킬로그램짜리 위탁 수화물 2개에는 도대체 무엇을 켜켜이 개어넣었단 말인가.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며칠 전 도착했으나 먹을거리라곤 나 좋아하는 간식용 소시지와 고구마말랭이, 믹스커피나 잔뜩 들어 있던 걸. 간편조리 미역국은 넣어보낼 생각을 미처 못했다. 평소에 밥을 안챙겨먹는데 국물요리 해먹을 생각일랑 했을리가 없지,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한번도 사본 적이 없었네. 엄마가 해주는 미역국을 늘 당연하다는 듯이 먹어왔을 뿐... 한식이라고는 고작해야 간편조리 떡볶이 정도 꾸깃꾸깃 챙겨넣은 내가 왜이렇게 철없어 보이던지. 어쨌든 지금 필요한 건 미역. 또 다시 한인마트에 가야했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한번도 사본 적이 없었네
보스턴 북부 지역에 위치한 한인마트. 캠브리지에 위치한 H-MART만큼 크지는 않아도 반가운 식재료, 있을 건 다 있다. 즐겨먹던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과자만 있다면이야.


보스턴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갔던 한인마트에 두 번째 방문했다. 한번 할 땐 어리바리해도 한번만 더해보면 어느정도 '눈치'가 생긴다. 능숙함은 없어도 익숙한 '척'하는 몸짓에 기술이 붙는 법이지. 한번 가본 곳이라고 마트 입장하는 내 태도에 조금 더 자신감이 붙은 듯 싶다. 사장님께 조금 더 반가운 눈짓으로 인사하고 이미 각각의 섹션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좀 더 흐느적흐느적 거닐 수 있는 여유. 좋아하는 먹거리가 있는 코너를 이미 눈대중으로 찜. 찜. 찜해두고 부지런히 <3분 미역>을 찾아본다. 3분 미트볼, 3분 카레... 아, 미역국은 3분으로 안되는 건가. 뭔가 있지 않을까. 뒷면에 써진 설명서대로 따라만 하면 되는 그 무엇! 그... 라면 봉지 닮은 모양새의 미역국은 도저히, 절대로 팔지 않는 것인가. 나홀로 머리를 굴리며 초코과자를 집고, 아이스크림 코너를 서성거렸다. 시간을 벌려던 작전은 실패. 계산할 타이밍이 다가오면서 다급히 이거라도 집어야겠다 싶어서 손을 뻗었다. "남편, 우리 줄기 미역 한 봉지 사야지.”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먹고 싶은 아이템이 자꾸 눈에 밟힌다. 또 한번 방문 전에 미리 찜해두고 골라와야겠군.


'언제 불리지?'

남편의 생일 전날 밤, 바스락 거리는 미역 한 봉지를 들고, 이걸 물에 불리고 자? 말아? 고민했다. 나, 꾸준히 쿠킹클래스 다닌 여자인데 가는 수업마다 천사같은 선생님들은 이미 잘 불려진 미역을 수업재료로 준비해주셨지 않았나. (앗, 이런 선생님들, 더 강하게 훈련시켜주시지 그러셨어요) 요리 노트에 어딘가 '미역은 언제 얼마나 어떻게 불린다'고 착실히 적어놓았겠으나 마음이 급하니 어디에 적어놨는지, 그 노트를 챙겨서 출국은 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이럴 땐 초록 검색창이지. 네모 칸에 미역, 언제, 불리- 세 단어를 탁탁탁 입력하니 몇 가지 팁들이 총알같이 튀어오른다. 20-30분 불리라는 조언들이 대다수인 걸 보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면 되겠다고 판단해 본다. 그런데 이것 참 이상해. 봉지에는 20인분이라고 써있는데 내 눈대중으로는 2인분밖에 안되어보이는 미역 조각들. 한인마트라서 봉지 번역이 잘못된 것 아닐까. 2인분을 20인분이라고 잘못포장한 거 아냐? 서프라이즈는 해주고 싶은데 맘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들을 끌어안고 새우잠을 잤다. 아, 근데 국물맛은 뭐로 내지. 한인마트에서 육수라도 사올 걸. 차라리 이럴 거면 한식당에 가지 왜. “여기요, 미역국 1인분 주문이요!”


찰칵찰칵 찍어온 사진을 보다가 뒤늦게 알았다. 한인마트에 미역국 조리세트 있었네 ! 그땐 왜 미처 보지 못했나. 심지어 매생이미역국이라는데. 억울함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순간

 


어쨌든 전쟁은 시작되었다. 디데이가 일요일이었던 덕분에 왠지 늦잠자기 좋은 날이었고, 나는 남편이 심드렁히 침대와 한몸이 되어있는 사이 미역국 한 그릇을 향한 질주를 시작했다. 마른 김 같기만 하던 미역조각들이 물에 찰랑찰랑 닿으면서 마법처럼 몸짓을 불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미역 불어나는 것, 처음 본 것 같잖아. 냉동실에 얼려져있던 돼지고기 몇 조각을 참기름에 달달 볶아 웅덩이 같은 팬에 투하. 여기서 양조절 잘해야 하는 것 맞지?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할 지 레시피를 봐도 감이 딱 오질 않아서 조심조심 생수를 붓고 또 부었다. 자신이 없으면 조금조금 더하는 게 낫겠지. 불린 미역도 퐁당 하고 나니 제법 모양새는 '나 미역국이에요' 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다시 또 시작되었다. 자, 이제 간은 어떻게 보는 건데요.



간을 보는 섬세한 작업을 하려면 '좋아하는 마음'이 전제돼야 했다. 간을 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방송을 하면서 이래저래 눈치 9단, '간' 참 잘 본다고 생각했다. 게스트의 마음을 '간' 보고 청취자의 반응을 '간' 보고. 편성국, 보도국 국장님들의 의중을 '간' 보고 회사 경영진의 전략을 '간' 보고. 10년차 아나운서쯤 되면 세상사, 사람 마음 간 보는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진짜 '간'을 볼 줄은 몰랐다. 안 좋아하니, 안 먹게 됐고 안 먹다 보니 뭐가 짠 건지, 뭐가 싱거운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정도면 '싱겁다'고 말해야 하나, '짜다'고 말해야 하나. 국물요리에 대한 경험치가 없어서 간의 척도, 그 적정수준을 판단할 척도가 내 안에 하나도 없었으니 말 다했다. 이번 생은 안되려나봐. 수많은 요리수업에서는? 그래. 그때는 선생님이 부지런히 다니면서 말씀해주셨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잘하셨어요." 칭찬해 줄 사람도, 별로라고 고개 저어 줄 사람도 없는 이곳. 갑자기 한국에 아닌 다른 곳에서 미역국을 만들고 있는 이 상황마저 원망스러워진다. 아, 여기까진 너무 많이 왔나? 자자, 침착하고. 심기일전. 짠 것보다는 싱거운 게 나을 거야. 생수 500ML 한병 중 4분의 1 정도를 또로록 따라 넣었다. 짜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얼큰함은 없고 깊은 맛? 절대 없다. 완전히 밍밍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담백하게 건강한 맛도 아닌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여보. 생일 축하해"


방송을 해오면서
이래저래 눈치 9단,
간 참 잘 본다고 생각했다.


칭찬해 줄 사람도,
별로라고 고개 저어 줄 사람도 없는 이곳.


보스턴에서 내 생애 처음, 33년 만에 미역국을 끓여보았다. 쿠킹클래스에서의 SNS 사진촬영용 요리가 아닌, 진짜 한그릇의 먹기 위한 미역국. 적당히 넣은 고기덕분에 씹는 맛이 제법 괜찮았나. 남편, 참 잘 먹어준다. 초보새댁의 사기 충전을 위해서일지, "맛있어. 진짜 맛있다니까" 격려를 얹어주는 남편.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으나 이 남편 이따가 속 아픈 건 아닐지, 안 맞는 간에 무리한 건 아닐지 괜한 걱정들이 미역 불듯이 부풀어 올랐다. 민망함이 미끄덩 미끄덩 불편한 감촉으로 떠다니는군. 아참! 2인분 같기만 하던 마른 조각 미역들을 너무 많이 불려서 결국 남편 옆에서 물미역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건 내 다이어트식이야"라고 우긴 건 안 비밀로 하겠다. 나 초보새댁이니까. 너그러이 귀엽게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쟁같던 미역국 식사가 끝이 났다. 우리 엄마는 고등학교 때 내 도시락 반찬을 어떻게 그렇게 뚝딱뚝딱 번개처럼 만든 걸까. 고깃국에 미역말아 한 그릇 내기조차 이렇게 땀 빼는 일인 것을. "남편 생일인데 미역국은 해먹여야지" 엄마의 며칠 전 잔소리에 마감지켜 숙제를 제출한 느낌. 엄마, 나 해냈어! 잘했지? 보스턴에서 미역과 사투를 벌인 이야기 종료. 아, 그런데 남은 15인분쯤의 미역은 어떡하지!


소박한 미역국에 고기말이 쌈 하나. 소박한 밥상에도 무한 감동해줘서 고마워. 남편.

 


사실 저는 미역국보다는 베이킹에 자신이 있는 여자입니다. 생일 하루 전날, 미리 치러낸 당근케이크 파티. 이건 좀 더 #성공적
미역국보다는 당근케이크가 사랑입니다.
"내 남편 안 내어났음 어쩔 뻔" 미역국 안 먹어봤으면 어쩔 뻔
그렇게 무사히 남편의 생일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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