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전 아이가 여섯살,
다시 오지 않을 귀여움이
온 일상을 가득 채울 나이.
붉긋한 단풍이 한창이던
오늘과 같은 가을 즈음이었다.
세 가족이 함께 간 여행에서
어김없이 신랑의 손에 아이를 맡기고는
숙소 안에서 컴퓨터 작업만 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이를 낳고 맞이하는 아홉 번의 가을 중
거의 대부분의 기억에 나는
'일에 빠져 사는 엄마'로 남아있다.
지금도 가끔 들여다보는 반짝이의 그림에
선명히 적힌 글자다.
컴퓨터 앞의 엄마를 그린 그림이
7살이었던 반짝이의 삐뚤 빼뚤한 글씨만큼이나
선명하게 그 삶을 보여주었다.
나로 살고 [싶은] 나.
엄마로 [살아야 하는] 나.
끊임없이 이 둘을 분리하려고 했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메세지를
단 한번의 여과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행복이 뭔지.
엄마가 뭔지에 대해
스스로 깊게 들어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꽤 오랜 시간, 나로 살고 싶은 '나'를 고수했다.
'멋진 커리어우먼 엄마,
돈 많이 버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주면 돼'
곱게 포장된 말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이 삶이 결코 나에겐 행복하지 않았지만.
(아마 아이에게도. 아마 가족 모두에게도)
이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다보면
행복한 날이 올거라고 믿으면서.
새벽 6시 반에 출근길에 나섰고
하루 시간 사이 사이를 빼곡히 내 일로 채웠다.
그러다 잠깐 틈을 내서 아이를 데리러 가고
잠깐 틈을 나면 아이와 대화를 하고
잠깐 틈을 쪼개 아이 책을 읽어 주고.
아이에게 주는 시간은
조각을 나누듯 내 것을 쪼개어 나눈 것 뿐이지,
엄마로서의 온전한 100을 아이에게 준 적이
사실 없었다.
어쩌면 바쁜 삶이
미덕이고 능력인 요즘 시대에
발맞추며 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던 것이리라.
내 일에 집착할수록.
더 '멋진 엄마'가 되려할수록.
내 마음의 중심에
아이가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느 한 순간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 기저에서 묵직하게 울리고 있던
본능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계속 계속.
내 마음을 두드리며 나를 일깨워준 본능의 소리.
'정말 내가 무엇이어야하는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
어느 순간 내 안의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삶의 템포를 늦춰보기 시작했다.
일을 점차적으로 줄여 나갔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했고.
'엄마'란 무엇일까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리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부분의 손실을 감안해야했지만
지금 당장의 손실이 중요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
지금 돌아보니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 가을,
그러니까 몇 주전.
반짝이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나 혼자 달리려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엄마'란 무엇일까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린 이후부터.
나의 발걸음에
아이의 삶을 끼워 맞추기보다
아이의 발걸음에
나를 맞춰가려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채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엄마인 내 자신이 아닌 아이였다.
'무엇을 하는 엄마'에서
'엄마 그 자체'가 된 삶에,
아이가 고맙게도 가장 먼저 반응해주었다.
나를 강인하게 지키고
온화하게 돌보는 엄마
⠀
아이의 입에서,
내 마음 가장 기저에서 울리고 있었던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늘 시간과 마음을 쪼개어 하려 했던
엄마의 '역할'에서.
그저 삶 자체가, 내 자체가
'엄마'라는 하나의 '존재' 자체로 바뀌고 나니
역할도, 희생도, 책임이라는 단어도
모두 나에게서 지워지고 있었다.
나를 잃게 할 것만 같았던 '엄마'의 삶이
사실은 '나'로서 온전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반짝이와 함께 하는 요즘,
특히 더 많이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
엄마의 행복은
결코 아이와 분리된 것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엄마라는 존재는
이미 아이를 그 안에 품은 존재이기에.
아이 안의 행복은
고스란히, 엄마의 행복이 된다는 것을
오늘도 끊임없이 떠올려려한다.
아이와의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에, 추억에 꾹꾹 담아보려 한다.
엄마로 살아가는 삶 속에,
아이의 행복을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는 것에,
삶의 의미와 행복이 들어있다.
그렇다.
엄마는 엄마일 때 가장 행복하다.
엄마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