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서른 한 살이 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은 서른 살과는 다른 듯 했다. 인터넷 검색 창에 책 제목으로 서른 살만 검색해도 페이지수가 몇 개는 넘어가는데 서른 한 살을 검색하면 책 제목으로 나오는 검색 결과 수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면 서른 살이 되면 자신이 서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서른 한 살이 되면 그제서야 아 내가 30대에 진입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실제로는 30살 보다는 31살이 더 임팩트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서른 한 살이 된 첫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2020년 1월 1일이었을테지. 아마 새해 일출을 보러갔거나 아무 생각없이 늘어지도록 늦잠을 잤을 터였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나는 인스타그램에 남긴 사진들을 역주행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액정화면을 별 생각없이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쓸어 올렸다. 쓸어올리면서 나는 인스타그램 속 나의 수많은 셀카들을 보았다. 보이시 해 보였던 짧았던 커트머리가 어느덧 단발 머리의 길이가 된 내 모습을 보면서 새삼 머리가 많이 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예전 애인은 셀카로 도배된 내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너는 자기애가 넘치는 구나라고 얘기했다. 아닌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데.
셀카의 홍수 속에서 인스타그램의 2019년 첫 사진은 1월 24일 자에 올린 사무실 속 내 책상 사진이었다. 그 때 쯤엔 내가 사무직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의 얼굴이나 추억을 찍어 올린 것이 아니라 그저 깨끗하게 정리 정돈 된 사무실 책상 사진 하나를 올린 걸 보면 말이다. 직종이 무엇이더라도 연봉이 작더라도 나는 좋았다. 그저 화이트칼라의 노동자로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지금 떠올려 보니 이건 현 작가지망생으로서 조금 부끄러운 과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라고 말이다.
나는 카라가 달린 와이셔츠에 H라인 스커트를 입고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를 신고 어깨 한 쪽에는 서류가방을 매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걸어다니는 모습에 대해 어릴 때부터 동경해 왔었는데. 그러면서 글로서 밥 벌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뭔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몸에 걸치기 편한 옷에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미지가 내게 있어서였을까. 사실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하고 다녀도 상관은 없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두 가지 생각은 항상 내 머리 속에서 충돌했다. 그 두 이미지 중에서 이겼던 건 언제나 전자였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둘 중 그나마 돈을 잘 벌 것 같았던 건 전자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했지만 돈도 벌고 싶었다. 그런 내게 어떤 사람이 무심코 툭 던지며 말했다. 글은 언제든지 누구나 쓸 수 있고 돈이 드는 일이 아니니까 취미로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전업작가의 길은 힘들다고. 나 또한 그 말에 거부감 없이 순응 했다. 어린 내가 생각해도 글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작가로서의 길을 먼 길을 둘러서 진입하게 된다. 어차피 작가의 삶을 살거였다면 진작에 이 길을 걸으면서 책도 많이 읽고 습작도 많이 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꿈꾸면서도 대학시절 나는 소위 스펙이란 것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토익, 대외활동, 공모전 이런 것들에 목매여 대학생활을 하는 건 인문학도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공 공부에 충실하기는 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 공부가 나에게 밥벌이를 하게 도와주기나 할까라는 생각에 설렁설렁 대충대충 임했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에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후회했다. 스펙을 높게 쌓지 않아서나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껏 살면서 제대로 된 노력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그래서 졸업 후에 나는 비행청소년처럼 방황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으니 그에 기반한 직업을 찾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웃긴게 취업을 위해 노력한 적도 없었으면서 취업을 하고 싶어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아니 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도 국어를 사랑하고 이와 관련된 직업을 얻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그저 언어영역 점수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왔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심리학과를 전공하고 싶었으나 수능 점수가 그 학과에 진학할만큼의 점수가 아니어서 온 것이기에 전공 공부에 열심일 리가 없었다. 그런 이유라면 다른 학교의 편입이나 재수를 하면 되었겠지만 고교시절 대학에 잘가고 싶다기 보다는 틀에 박힌 갑갑한 생활을 탈출하기 위해 버티기만 했던 사람으로서 더 이상의 입시를 위한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노력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것 밖에 더 있으랴.
이유야 어찌되었건 영어영문학과나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 등과 같은 외국어 전공을 했더라면 취업 방향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 졸업자였다. 잡지사나 출판사 에디터,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가 아닌 이상에는 일반적인 회사에는 취업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나열한 직업군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부산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왔는데 이곳에는 그런 직업군의 회사가 거의 없기도 했었다. 단순히 국문학과를 전공했다고 해서 부산이라는 곳에서 취업 문턱에 비빌만한 명목이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수차례 좌절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서울로 올라가서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취업 준비를 할만한 용기조차도 내게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29살 우연한 기회로 첫 직장을 가지게 된다. 직업상담 회사의 사무행정 직으로 들어왔다가 더 큰 곳에 도전해 보고자 퇴사했다가 실패하게 되고 30살의 어느 여름 날, 다시 두 번째 직장을 가지게 된다. 글로서 밥벌어먹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을 자소서에 넣어서 온라인마케팅 회사에 원고 쓰는 일로 취업하게 되었는데 초반에 나는 그 일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를 직업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얼떨결에 맞이하게 된 서른 살에는 그 회사에서 원고 쓰는 일로 종일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10개월 뒤에는 그 감사함이 간사하게 바뀌어 틀에 박힌 광고 홍보 원고를 적는 일에 넌더리가 나고 더 이상 글을 적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퇴사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서른 한 살 첫 사진으로 사무실에 있는 책상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릴 정도면 그 당시에 그 일에 대한 애착은 있었던 것 같다.
퇴사 후 3개월 간의 휴식기를 거치면서 고민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31살의 나는 작가가 되기로 다짐한다. 내가 잘했던 일,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일, 밤새서 몰입해도 지겹지 않았던 일, 살면서 돈을 벌게 해 줬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그 답은 전부 다 글쓰기 였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꿈을 서른 한 살이 되어서야 부모님에게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너무 늦은 시기의 발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100세 시대에 늦은 게 뭐가 있으랴. 사실 말하기 전만 해도 쓸데없는 생각말고 돈 벌 궁리나 해라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아서 내심 겁먹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니가 잘할 수 있는 걸로 하면 된다 혹은 그러던가 라는 반응이었다.
31살이 되어서도 직업에 관해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는 건 아직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20대 때는 서른 한 살이면 직업적으로 뭔가 뿌리를 내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야 시작 단계라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원했던 직업을 이제야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