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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크로치 Dec 10. 2022

삶에는 디폴트가 없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살아보니



월화수목금 5일 내리 출퇴근 길의 인파 속을 헤집는다. 서서 가야만 하는 지하철에서 역마다 서고 출발할 때 관성에 지지 않으려 다리 근육을 다잡고, 그렇게 매번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의 나는 헬스장이라도 다녀온 마냥 땀을 뻘뻘 흘린다. 영하 10도의 겨울 날씨에도 내복이 축축하다. 매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과 마음을 움직이다 보니 주말에는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있는 것이 가장 편하다. 만약 주말 이틀 약속이 있다면 몸과 마음을 제대로 쉬어줄 수 없으므로 그다음 주는 필연적을 만성피로와 함께 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나름 외향형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내향형이겠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한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약속이 없는 주말이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헬스장을 다녀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유롭게 커피 한 잔과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샀다. 헬스장에서 나오는 김에 치킨도 배달시켜뒀다. 샌드위치와 치킨을 적당히 배부르게 해치우고 난 뒤에는 다시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추운 겨울에는 말이다. 전기장판, 귤, 따뜻한 물 또는 음료만 있어도 겨울 감성을 몽글하게 피어오르게 만든다. 여기에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까지 곁들인다면 안락하게 몸을 뉘일 수 있다. 요즘에는 일할 때 로파이(Lo-Fi)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집중한다. 뭔가 가사 없는 나른한 멜로디가 겨울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다. 이 글은 집에서 전기장판, 귤 그리고 로파이 음악을 세팅하고 작성하는 오늘, 토요일의 생각이다.



인간이 내포하는 상대성



살면서 늘 의문을 가져왔다. 각 국가마다 법률과 규칙이 존재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판사이며 혹은 판사가 아니더라도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주관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법률뿐만이 아니라 과거 또 다른 사람이 내린 결론인 판례를 참고하므로, 법으로 갈라치는 옳고 그름이란 결국 절대적일 수 없지 않은가? 신이 존재한다면, 절대적인 존재인 신에게는 사람처럼 인격이 부여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낼 능력이 있다는 것인가? -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가?(신이라서 가능한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것은 딜레마와 모순을 마주할 것이란 예고와 같은 말이 아닌가? (신은 모순이 존재하지 않도록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은 일정하지 않으며, 일관적이지 않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한평생 살아온 내가 '거의' 확신하고서 말할 수 있는 명제다.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일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일정한 루틴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나 주위에 존재하는 타인들과 세상이 일정하지 않는데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변하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일관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든지 간에 인간이란 존재는 가변적이고 또 상대적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기준도 변하는 것이 아닐까. 나와 상대 사이의 오해, 실수 등의 제3의 개입 변수의 파이도 고려해서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의 기준이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처벌도 합당치 않을 테니 우리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불확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어느 것 하나라도 '옳다'거나 '맞다'거나 '사실'이라고 일컫기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나와 타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인간과 이 세상은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결론이라고 내리긴 내렸지만,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아직 이에 대한 반례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든 생각에 더 가깝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때에 따라, 마음에 따라 언제나 다르다



인생이 (불)평등한 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불평등하다'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 다른 인간은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  각기 다름을 장착한 서로는 그 다름을 기반으로 비슷한 모습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고유한, 유일무이한 독립체이다. 다름과 다름이 서로 부딪히는 판국에 그것들의 합이, 특정한 기준점 하나를 향해 나아갈 리가 없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채 시작점에 선다. 역으로 생각하면, 애초에 동일한 조건 하에서 태어나고, 동일한 능력을 부여받아 서로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사람마다 가진 몸과 마음의 기능치가 다르다. 


많은 이들이 더러 인생은 불평등하다고 말하겠지만, 실상 인생은 평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여 내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와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절대 아니다. 앞선 게시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과도하게 제약했던 어릴 적 기억이 좋지 않게 자리 잡은 경우이다. 배는 곯지 않을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고 장학금을 여러 군데서 받아 학부과정을 마무리했다. 학교 랭킹이 더 높은 대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장학금을 가장 많이 수여했던 대학에 최종적으로 진학했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는데 매주 학교 근처 교회에 나가 무료로 제공해주는 식사를 해야 했다. 지금까지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 다만, 지금은 배가 고플 땐 하다못해 컵라면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과 추운 날 벌벌 떨지 않고 몸을 뉘일 수 있는 전기장판과 롱 패딩이 있기에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먹고 싶고 음식과 사고 싶은 물건에 돈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아끼자는 생각이 늘 상충하는, 외국에서 태어나서 2개 국어 이상을 한다거나 국제학교에 진학했으면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살이 찌지 않고 근육이 많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내 안에서 인생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우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니까 불평등하다고 말하지만, 되려 다르니까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평등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로 태어난 A가 가진 재력만큼 가난한 B가 특정 능력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닐 테다. 어릴 적 유학을 통해 자연스레 외국어를 습득한 C와 다르게 토종 한국인인 D가 엄청난 끈기를 발휘하여 외국어를 마스터한다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이라거나 능력적, 사회적, 법률적 평등 등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하나의 인격체가 지닌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의 디폴트가 없다는 것은,



다시금 놓여져야만 하는 특정한 삶의 형태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정해지지 않은 루트를 마주해야 하는 필연적인 법칙 속에서 삶의 디폴트는 존재감이 드리워지지 않았다. 언제 우리네 삶이 뜻대로만 흘러왔겠나? 우리는 나와 타인들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예측 가능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예측 불가능 일들을 다룰 때에는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감정적으로 힘에 부쳐서, 대응할 여력이 안 되는 환경에 놓여 있어서 등의 여러 이유로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각도로 변화하는 매 순간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온전히 똑같은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변할 것이고, 내 주위의 타인들이 변할 것이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할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 같은 맥락에서 매 순간은 유일무이하다. 서로 다른 타인들과 수많은 변수들 속에서 이 순간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 변화에 유연한 사고, 즉 포용력과 이해심을 장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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