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잡힌 이불, 물때 하나 없는 세면대, 볕 드는 거실에 앉아 돌리는 오후의 재봉틀.
언뜻 보면 미니멀리즘, 살림하는 주부의 브이로그 같지만, 어느 출소자의 집 풍경이다.
야쿠자 출신답게 연신 ‘예’하면서 예의 바르게 대답하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될 땐 그는 야수가 된다.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남자가 언제 폭발할지 몰라서. 같은 시 공간을 살고 있지만, 그가 사는 세상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와 살기 위해 자신의 껍질로 철저히 숨어드는 우리가 만나는 지점은 분명 불편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그에겐 비겁한 변명으로 들렸다. 아이처럼 물었다. “왜죠?” 수많은 어른이 육십이 다 돼 가는 아이에게 말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거란다. 참고 견디는 법을 좀 배우렴. 아니면 또 가두게 될지도 몰라.”
아이는 두려웠다. 정당방위 살인으로 잃었던 자신의 시계가 다시 멈출까 봐.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사는 세계를 이제 겨우 열었는데 다시 눈앞에서 닫히게 될까 봐. 영화는 단순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고, 어른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는 낯선 장면이었다.
사회성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무관심’의 옷을 매일 입는다. 옷의 적당한 두께는 얼마나 편안함과 만족감을 주는지. 문 열기 전 거울 속 모습을 살펴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렇게 서로가 고른 옷들이 문밖 세상에서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수많은 정의 앞에 인내하면서.
분명 내가 보는 건 스크린인데, 남자가 만나는 어른에게서 옷장에 걸린 수많은 옷이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말랑한 삶의 의지가 갑각류의 무관심으로 포장된 적이. 아마 취직을 하고 나서였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하루하루가 감정이 거세되는 연속이었다. 하지만 ‘왜’가 ‘어떻게’로 변하는 데에는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갓 입사한 신규직원들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신입 때 느꼈던 그 거대한 물음표가 그들의 눈 속에 한가득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그 말간 눈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를 본다. 폭풍우 치는 밤, 주인공의 손에 들린 이름 모를 들꽃처럼.
남자는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옷장 속 옷이 아니라 이 들꽃이 아니겠냐고. 사랑의 방식은 달랐지만, 영화 <멋진 세계>의 미카미야말로 삶을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책모임을 통해 들꽃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