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하실라비드
01. 오전 8시 30분
사막의 하루는 단조롭다.
아침 8시 30분, 사막에서의 하루는 늘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식당으로 향하면 어제도 본 듯한 아침 메뉴가 식탁 위에 가득하다. 식당 한쪽에는 언제나 밥때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다른 장기투숙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밥때가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장기투숙객 중 갑자기 아침을 먹으러 안 내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백 퍼센트 물갈이거든. 다행히도 여행에 최적화된 내 몸은 물갈이 따위는 없다. 튼튼한 위장에 감사를 표하며 빵에 잼을 한가득 발라 먹는다. 아, 물론 요거트도 빼먹을 순 없지.
02. 오전 10시
이 단조로운 곳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장기투숙객끼리 친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같이 테라스의 좁디좁은 그늘에 모여앉아 시간을 보냈다. 얼마 없는 그늘에 의자를 옮겨 다닥다닥 앉아 있는 꼴이 멀리서 보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미누 언니는 포르투 두 달 살기 중 모로코로 여행을 온 여행자였다. 언니를 처음 본 날, 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내게 “어?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하고 외치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언니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여행을 만화로 그리고 있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로 테라스에 앉아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언니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니의 만화를 보는 것 역시 사막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심지어 사하라를 떠난 뒤에도 나는 언제쯤 등장할지 궁금해하며 언니의 만화가 업로드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기도 했다.
혜미는 동남아부터 시작해 벌써 5개월째 여행 중이었다. 하루는 혜미가 나와 미누 언니에게 팔찌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매듭을 일정하게 만드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혜미야, 이거 어떻게 묶어?”
마지막 매듭은 항상 혜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끝에 완성된 팔찌는 엉성했지만 내 눈엔 그 어떤 팔찌보다 멋졌다. 처음으로 만든 팔찌가 사하라 사막을 보면서 만든 팔찌라니…. 모양은 조금 엉성할지언정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물론 그놈의 낭만 때문에 이제는 해어질 대로 해져버린 팔찌를 버리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막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도, 거기에 따라오는 외로움까지도 사랑한다. 다음엔 누구와 사하라를 갈 것이냐 묻는다면 또다시 혼자 가겠다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사하라가 더 다채로운 색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사랑하고 혼자이길 자처했던 나이지만 결국, 여행은 사람이었다.
03. 오후 3시
오후 3시가 되면 다들 낮잠에서 깨어나 1층에 모였다. 이 시간, 우리의 대화 주제는 항상 똑같았는데 바로 ‘점심 메뉴’였다.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실라비드에 몇 없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현지 라면을 끓여 먹거나. 오늘의 선택은 라면이었다.
숙소에서 슈퍼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슬리퍼를 찍찍 끌며 도착한 슈퍼에서 새로 들어온 라면을 싹쓸이한 뒤 맛있는 과자는 없나 둘러본다. 그리고 모로코의 싼 물가에 행복해하며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우리 이 정도면 거의 현지인 아냐?”
누군가의 말에 서로를 보니 정말 현지인처럼 느껴진다. 라면 봉다리와 콜라를 양손에 들고 하실라비드의 낮은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이 모습이.
왠지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04. 오후 9시 30분
“오늘은 몇 명일까?”
“왠지 평소보다 음식이 많은 것 같지 않아?”
“오늘 많이 오려나?”
오후 3시경 우리의 최고 관심사가 점심 메뉴였다면 저녁 시간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마라케시에서 오는 버스’였다. 마라케시에서 오는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오후 9시에서 10시 사이. 우리는 과연 몇 명의 여행자들이 이 버스를 타고 넘어올지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를 애타게 기다리곤 했다. 그 이유는 마라케시에서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 때문이었다. 혹은 단조로운 사막 생활의 유일한 변화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오늘은 몇 명의 여행자가 올지 맞히며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그때,
우리는 정말 진지했다는 거다.
05. 새벽 2시 30분
새벽 2시 30분은 은하수가 가장 잘 보인다는 시간이다. 사막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졸린 몸을 이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일어나는 건 힘들지만 막상 테라스에 누워 하늘을 빼곡히 메운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어나길 잘했다’ 싶었다. 별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혼자 요란법석을 떨고, 별자리 어플로 내 별자리를 찾아보고, 사이드가 알려준 방법대로 별똥별에 소원을 빌어보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은하수가 내 머리 바로 위에 와있다.
‘좋아, 이제 들어가서 잘 시간이야.’
별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며 은하수가 머리 위에 올 때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단조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사막에서 나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