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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o Choi Jun 23. 2021

사랑 없는 밤

비문

알몸이 되어 서로를 온몸으로 느끼면 자연히 온기는 열기로 변하고

정막 하던 공간은 소란해진다.


사랑해

“…. 나도


말은 늘 말일뿐이다.

오직 서로의 육체만을 느끼며 내뱉어진 ‘사랑’이 방안 구석구석 자리 잡은 어둠 속으로 켜켜이 쌓여가다

다시 정막이 찾아오면 그저 밤이다.


그리고 그 밤 너와 나는 영원한 그 밤에 묻혀버렸다.


이윽고 너는 휴대전화로 음악을 틀어놓은 채 침대 위를 뒹굴며 웃었지만,

나는 괜스레 처참하고 난처한 마음에 창밖 도시를 바라보며 담배를 물고 태워댈 뿐이었다.


너와 나는 그런 밤을 몇 차례 보내다 흩어지듯 이별했다.

고작 한 계절 조차 채우지 못한 채 말이다.


역시 말은 그저 말일뿐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훤히 느껴지는 서로가 열기를 핑계 삼아 내뱉던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여전히도 사랑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으니.


다만 그 밤 이후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려 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일종의 부채감이랄지, 공허함이랄지.

그런 불편한 감정이 스친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라는 인간은 기억이라는 것에 굉장히 취약한 존재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나에게는 그 밤의 기억은 쉽게 지우기엔 어려운 인상으로 악몽처럼 자리 잡혀 있다.


생각해보면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을 거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데 아무렴 어떻다는 말인가.

일종의 분위기에 따른 하나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고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연인의 섹스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빠진다면 그것도

웃기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어쩌면 그런 생각에 일종의 파도타기처럼 휩쓸려 말한 것도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표현 거부 상태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랑해’라는 말에는 늘 ‘피식’이 전부였고, 그로 인해 관계가 끝나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별로 슬프지도 않았고 딱히 헛헛하지도 않았다.

상대가 날 사랑한다 해서 무조건적으로 나 역시 사랑에 빠질까, 아니. 인간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는 신뢰와 믿음 그리고 애정은 줄 수 있었지만 사랑을 줄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그 밤이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알 수야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되어있었다.

이런 태도에 대해 ‘과민하다’라고 말하거나 지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나는 그저 ‘그렇군요’라 들어주는 척하며 떠올린다.


 밤에 정말. 진심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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