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 살고 있는 삼십 대 후반의 housewife이다. 아이는 없다.
오늘 4달째 그렇게 해왔듯 운동 루틴의 가장 첫 운동, 사이클을 타는데 국적도 알 수 없는 늦은 중년의 동양인 여성이 내가 타기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내 옆에 있는 사이클에 올라탔다. 짐에서 못 보던 분이다.
한국인이라고 그냥 첫인상에 느꼈지만, 아닐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렇게 생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우리 엄마 나이대로 보이는 분이, 그냥 그렇게 내 옆에서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다. 난 정말 그냥 엄마의 존재가 필요한 거구나. 이왕이면 마음이 건강한. 자식이 나이대별로 경험하며 느끼는 모든 폭의 감정들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감싸주고 커버할 수 있는 존재.
'나도 그랬었어, 별거 아니야' 이렇게 말해 주는 존재. 정말 대단한 파도처럼 나를 덮쳤던 감정들도 자장자장 하며 잔물결로 만들어 그저 나를 통과하여 무사히 지나가게끔 하는, 그걸 같이 바라봐 주는 존재. 그 존재를 나는 무한히 원했다.
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원했던 것을, 나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 곧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가까워지게 하는 걸까.
얼마 전 나의 부모와 대화 중 증여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증여를 받으면 뭘 할 것인가.
증여가 내 결핍의 구멍을 메워주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의 마음의 짐을 덜고는 그렇게 어느 날 훌쩍 가버린다면, 그 구멍은 정말 끝끝내 메워지지 못할 것 이란것, 그래서 누구라도 안심하고 디딜만한 그런 단단한 땅이 영영 되지 못할 것, 이것은 자명하다.
나의 지대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부드러운 흙을 언젠가 꼭 밟아보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내 땅에 발을 들였을 때 그저 평안하기를. 맨발로도 안전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기를.
그 흙에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꿈꿔본다.
이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토양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하다.